김남희의 보내지못한 편지
그녀는 중국을 떠나 지금 중동에 있다.
여행가의 교감을 위해서 여기에 소개한다.
일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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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11일 화요일 맑음
모든 게 엉망인 밤이었다.
전 날 오후부터 꼬박 스무 시간에 걸쳐 드라마 ‘파리의 연인’ 스무 편을 연달아 보고난 뒤끝이라 귓전은 멍멍했고, 눈은 따갑고 침침했다.
지루하고 참담하기까지 한 일상을 잠깐이라도 견디게 하는 근사한 연애담.
마법에 걸린 공주도 아닌 처지에 백마를 타고 올 왕자를 꿈꾸게 만드는,
당신도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고 속삭이는, 중독성 강한 환각제를 과잉 복용한 뒤끝.
‘이런 천편일률적인 삼류 드라마 따위’라고 한껏 무시해보려 해도 머릿속에는 ‘명장면’ ‘명대사’가 윙윙거리고 있었다.
결정타는 승수형에게서 날아온 두 통의 이 메일.
‘이 자식 밥은 안 굶고 다니는지. 눈에 밟혀 안 되겠다. 편지라도 써야지.’
‘남식아 보고 싶다. 걱정되니 연락 좀 해라.’
형은 참, 내가 그동안 보낸 동보 메일이 몇 통인데 웬 뒷북이람...
중얼거렸지만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갑자기 왜 서럽고, 쓸쓸해졌던 걸까.
아픔은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고통의 강도는 흐릿해지고,
슬프다고, 쓸쓸하다고 소리 내는 그 순간 슬픔도 쓸쓸함도 다 흩어져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 순간 나는 분명 서럽고, 아프고, 쓸쓸했다.
그래서 울었다.
방문을 닫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난 후, 왜 불현듯 지나간 남자, 재이가 떠올랐던 걸까.
이제 돌아선지 1년 5개월.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찬 겨울 끝 서둘러 먼저 핀 첫 봄꽃을 함께 들여다보고 싶은 남자이고,
갓난아이 손가락 같은 여린 은행잎이 돋는 날빛 좋은 날이면,
남도의 산자락에 얼레지며 금낭화가 필 무렵이면,
지루한 장마비 끝에 파란 하늘 문득 나온 더운 날이면,
잎 지고 홀로 선 나무들이 저마다의 거리에 스스로 서러울 무렵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며,
유행가 가사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
내리는 비에 몸보다 마음이 먼저 젖어드는 날,
혼자 먹는 찬 밥 한 공기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날,
그런 날 만 리 밖에서 서울을 생각할 때면,
또렷하게 다시 살아나는 얼굴이다.
오래도록 함께 늙고 싶었던 유일한 남자.
그를 기다리던 중앙우체국과 명동의 골목길.
둘이 같이 걷던 광화문 사거리와 삼청동길.
북한산의 구기동길과 우리 산하 곳곳의 좁고 오래된 길들과 높은 산들.
이제 그 길들은 그저 길이 아니고, 그 산은 그저 산이 아니며,
찻집도, 밥집도 그저 그런 찻집과 밥집은 아닌 것이다.
그에게 위로받았던 만큼 그를 아프게도 했으며,
함께 웃었던 순간만큼 따로 또 같이 울었던 시간도 많았고,
예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것들이
그가 함께 있어 예뻐지고 특별해졌으며,
세상은 그로 인해 환하게 빛나고 아름다웠다.
헤어져야 했을 때 한동안 비틀거리기도 했지만,
곁을 주지 않는 냉정함에 기대어,
그리고 어쨌든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를 ‘여행중’이었으므로,
비교적 ‘쿨’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만나면 웃는 얼굴로 더운 밥 한 끼를 나누자는 제법 태연한 척 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하지만 여행을 시작한 이후, 아니 그를 만난 저 몇 해 전의 어느 봄 이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저무는 하루가 내게 있었던가.
아직도 처음처럼 아프고, 그립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어떤 순간들은, 여전히 퍼렇게 날이 선 채 남아 있어
가끔은 그 날카로운 칼끝에 어이없이 베이기도 한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잘 벼린 칼날로 뒷목을 치는 날들.
혼자 먹는 식은 밥.
혼자 올라 탄 밤 기차.
그 기차가 더럽고 지저분하고 낡았다면 마음은 더 빠르게 흔들린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
그것도 옷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
그리고 오늘처럼 무언가가, 자주 돌아가지 못하는 서울을 떠올리게 하는 날.
그런 날이면 가만히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서른 번쯤 불러보고는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이 일으키는 고요한 물결이 아직도 미세하게 나를 흔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쩌면 나는 그를 사랑했다는 내 감정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닐까.
돌아보니 서른을 넘긴 이후 내 인생은 궤도를 벗어난 철도처럼 그렇게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새 천 년이 시작되던 해, 만으로 꽉 찬 서른이 되던 그 해에
나는 10년을 만나온 남자와 헤어졌고, 그 후 연거푸 연애에 실패했다.
그리고 길 위에 오른 지금, 아무나 사랑하고 싶지만 누구도 사랑하지 못해 외로운 나.
나는 지금 지구의 한 귀퉁이에 혼자 서 있는 잊혀진 행불자다.
오래 지워지지 않을 아픈 이름 하나를 품고 있는.
아, 신파로 시작해 신파로 끝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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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의 집에서 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