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사는 법
2009년 5월 23일
중앙일보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정진홍 논설위원
멋지게 늙는 법
언젠가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우아하게 늙어가는(aging gracefully)’ 미국인 10명을 선정한 바 있다. 남성으로는 1937년생인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등이 선정됐다. 여성으로는 1941년생인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역시 동갑내기 인권운동가이자 반전 평화운동가인 가수 존 바에즈, 1931년생인 노벨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 그리고 1930년생으로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남편 간호를 위해 대법관 자리를 버린 샌드라 데이 오코너 등이 포함됐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멋지게 늙어가는 사람 10명을 꼽으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일단 정치인 중에서는 전무할 것 같다. 경제인 가운데서도 선뜻 꼽기가 쉽지 않다. 워런 버핏 같은 이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화 혹은 예술인 가운데서는 분야별로 몇 사람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의 박정자와 손숙, 음악의 이강숙과 신수정, 그리고 국악의 황병기와 안숙선 등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스스로 멋지게 늙어가고 있다는 것에 손사래를 칠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진짜 멋지게 늙어간 사람이 있다. 김득황 옹(翁)이다. 그는 58세였던 1973년 4월부터 94세가 된 지난 3월까지, 만 36년 동안 ‘입양아들의 아버지’로 살았다. 1915년 평북의주 생인 김 옹은 공무원 월급으로 5남1녀를 키우면서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과 폭격 등으로 부모를 잃거나 길거리에 버려진 전쟁고아 세 명을 자식으로 들였다. 그리고 1967년 내무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한 김 옹은 어린이 구호단체인 한국십자군연맹 등에서 일하며 고아원 지원 사업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1973년 동방사회복지회를 창설해 6만여 명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에게 새부모를 만나게 해줬다. 그는 36년의 세월 동안 입양되어 떠나가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끌어안고 올망졸망한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이런 기도를 올리곤 했다. “어린 것을 상처 입혀 또 이렇게 떠나보내오니, 꼭 이 생명을 지켜주시옵소서.”
김득황 옹의 삶은 정호승 시인의 ‘봄길’을 빼닮았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결국 김 옹의 기도를 받고 4만5000여 명은 해외로, 1만5000여 명은 국내로 입양됐다. 김옹은 사랑의 봄길을 열며 가장 아름답게 또 가장 멋지게 늙어간 사람이리라.
로저 로젠블라트는 『나이 듦의 법칙(Rules for Aging)』이란 책에서 나이들수록 이렇게 하라고 권한다. “나쁜 일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라.” “‘대단해’란 찬사를 조심하라.” “외로움보다는 차라리 싸움이 낫다.” “한꺼번에 인생의 8분의 1이상을 바꾸지 말라.” “먼저 사과하고 화해하라, 그리고 도움을 주라,” 『계로록(戒老錄)』을 쓴 소노 아야코 역시 이렇게 당부한다. “늘 인생의 심리적 결재를 해두라.” “푸념하지마라.” “젊음을 시기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더 멋지게 꾸릴 생각을 하라.” “남이 ‘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 “지나간 이야기는 정도껏 하라.”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기르라,”
누구나 늙는다. 그것은 결코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담담한 늙음은 때로 젊음보다 멋지다. 젊음이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그 뭔가가 늙음 안에는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늙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