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객들의 중국 여행기(2)--문백

2015. 5. 4. 21:22카테고리 없음

 

 

 

 

 

 

 

 

 

일곱째 날

 

4월 17일 금요일 아침, 우리의 ‘KTX'에 해당하는‘까오티(高鐵)’편으로 낙양으로 떠났다. ‘까오티’는 날렵했다. 매끈한 유선형 몸매에 외관도, 색상도 세련되었다. 객차의 좌석은 ‘KTX' 보다 여유가 있고 등받이의 유연성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깨끗하고 조용했다. 여승무원들도 늘씬하고 표정도 환하였다. 시내를 벗어나자 전광판에 속도가 표시되었다. 순식간에 시속 200km를 돌파하더니 300km를 유지하고 있다. 더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자제하는 것 같다.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내용은 정중했지만 자부심이 짙게 배어있었다. 중국은 세계 최고, 최대의 철도대국이다. 철도의 총연장거리나, 철도차량의 제작, 설치는 물론 철도운행의 노하우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중국철도는 13억 인구의 발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낙양에 도착했다. 10시가 조금 지났다.

 

용문석굴(龍門石窟)은 평일인데도 인산인해였다. 입장료가 120위엔이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24,000원 정도이다. 어디를 가나 입장료가 녹녹치 않았다. 제일 싼 곳이 50위엔이었다. 중국의 70세 이상 노인들은 입장료가 면제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쩌다 한두 군데 빼고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여기 와서 관광지 입장료와 케이블 카 탑승비, 시내 교통비 등을 무시하면 낭패를 볼 것 같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생각보다 크고 그에 대한 대처가 짜증이 날 정도로 철저하였다. 비행기는 물론 기차를 탈 때, 지하철을 탈 때, 관광지나 박물관을 입장 할 때는 예외 없이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면서 사람과 휴대품을 검사받아야 한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석굴은 도록에서 보던 바와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넘치는 인파가 인상적이었다. 외국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전부 중국인들이었다. 사람의 행렬에 갇히고 밀리면서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기가 힘들었다. 날씨는 덥고 다리도 아팠다. 구련산 절벽을 걸을 때보다 더 피곤하였다. 마침 호수를 오가는 유람선이 있어 그것을 타기로 하였다. 시원한 호수 위에서 석굴을 바라보는 전망은 가대이상의 호사였다.

 

오른 쪽으로 향산사(香山寺)가 보였다. 당 나라의 백거이(白居易, 白樂天)가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여생을 보낸 곳이다. 백거이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는 학식이 높은 사대부를 위한 시를 쓰지 않고 글자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해 노래(詞)를 지었다. 그는 당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다룬 장한가(長恨歌)를 지을 때 초고를 빨래터로 가지고 가 읽어주며 그 부인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고 전한다. 이러한 시작(詩作)태도는 당시의 사대부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남들이 깜깜 할 때 자유와 평등, 사랑을 깨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백거이의 묘에서 배를 내려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도삭면으로 점심을 든 뒤 오후 3시쯤, 백마사(白馬寺)에 도착했다. 백마사는 중국 최초의 절이다. 광무제의 뒤를 이은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이절을 세웠다 하기도 하고, 67년,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 등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낙양에 도착하자 황제가 그들을 위해 이절을 지었다고도 한다. 입구에 ‘성스런 가르침이 서 쪽에서 왔노라.(聖敎西來)’는 글귀가 새겨진 일주문이 높이 솟아 있다. 절 안에는 관광객만 가득할 뿐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불당 좌우에 모란이 만발하였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육조전(六祖殿)’이란 편액이 걸린 건물이 보였다. 들여다보니 달마(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의 좌상을 모셨다. 이분들은 선불교(禪佛敎)를 개창한 중국의 조사(祖師)들이다.

 

백마사 앞, 들판에서는 모란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높은 가름막 틈새로 그 안의 모습이 엿보였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것 같다. 아낙네들이 팸플릿을 나누어주며 모란을 소개하고 있었다. 모란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을 미처 몰랐다. 색깔별, 개화시기별, 파종시기별로 수백 종이나 되었다. 이 축제가 열리면 모란을 구경하고 모란을 사가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애호가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갑자기 낙양시내의 호텔 방값이 두 배로 뛰었다고 김 대표가 혀를 찼다. 여인네들은 어린 소녀부터 젊은 처녀, 할머니들까지 모두 머리에 모란화관을 쓰고 다녔다. 윤 여사와 정 여사도 그렇게 했다.

 

김 대표가 택시를 잡아주며 관림(關林)으로 오라고 말한 뒤 다른 팀을 데리고 떠났다. 관림이란 소설 ‘삼국지’의 영웅, 관운장의 묘이다. 택시 기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시가지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다 다시 시내로 들어섰다. 길이 많이 막혔다. 그녀는 뭐라고 몇 마디 묻더니 손가락으로 길 건너를 가리켰다. ‘관림상성(關林商城 꽌린상청))’이라는 대문이 보였다. 찜찜했지만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기다렸다. 20여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못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계시는 곳에서 별로 멀지 않으니 슬슬 걸어오세요.”하였다. 핫도그를 파는 가게에 관림 가는 길을 물었다. 몸짓과 필담이 한 동안 오고갔다. 핫도그는 아주 잘 팔렸다. 중학생 또래의 소녀들이 계속 찾았다. 그래도 핫도그 주인장은 짜증을 내지 않고 나를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1km쯤 내려가다 좌회전해서 다시500m 쯤 직진하라는 뜻을 알아듣게 되었다. 일행은 우리를 기다리느라고 입장도 못하고 광장에서 쉬고 있었다. 관림은 그냥 커다란 동산에 나무만 무성 할 뿐 한가했다. 수염을 무릎까지 늘어뜨린 관운장 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제까지 많이 본 익숙한 얼굴이었다.

 

여덟째 날

 

4월 18일, 아침 9시 반, ‘까오티’편으로 낙양을 떠나 10시 반쯤 화산북(華山北 화산베이)역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작은 배낭에 비옷과 바람막이 겉옷, 물과 간식거리만 챙겨 화산 트래킹에 나섰다.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기어코 비가 내렸다. 화산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북봉(雲台峰, 1,614m), 동봉(朝陽峰, 2,090m,) 남봉(落雁峰, 2,160m), 서봉(蓮花峰 2,080m), 옥녀봉(玉女峰)이다. 옥녀봉은 원래 동봉에 속하는 봉우리였으나 여러 봉우리들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보여 독립된 봉우리로 특별대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북봉과 서봉에는 각각 꼭대기까지 바로 닿는 삭도(索道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트래킹 코스는 둘이다. 삭도를 타고 북봉에서 내려 서봉 쪽으로 걸어 올라가 그곳에서 삭도를 타고 내려오거나 그 반대로 서봉으로 올라가서 북봉 쪽으로 걸어 내려와서 삭도를 타고 내려오는 방법이다. 북봉에서 서봉 코스는 계속 오르막이어서 보통 3시간 정도 걸린다. 서봉에서 북봉 코스는 내리막이라서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길은 외길이고, 모두 화강암을 깎아 만든 계단인데 너비 1m 안팎, 폭 20cm 쯤, 높이 30cm정도이다. 오르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이 한 사람씩 간신히 비켜갈 정도이고 계단을 디디면 신발의 절반만 바닥에 닿는다.

 

우리는 매표소 앞에서 잠깐 회의를 가졌다. 내외가 같이 온 팀은 서봉으로 올라가 산장에서 휴식을 취하다 북봉에서 올라오는 팀을 만나 같이 서봉삭도를 타고 내려오기로 정하였다. 비가 내려 계단이 미끄럽고 시야도 흐리기 때문이었다. 12시쯤 헤어졌다. 김 대표가 늦어도 오후 4시까지 북봉 팀이 서봉에 도착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삭도를 타고 내려가라고 서봉 팀에 당부하였다.

 

12시 25분, 북봉삭도를 타고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논검대(論劒臺)라는 곳이 나타났다.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화산파의 검술연마장이라는 뜻이겠다. 소설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억지로 꾸민 무대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왕모궁(王母宮)까지는 김 대표와 우리 넷이 한 줄로 잘 올라갔다. 그곳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함께 올라 왔는데 글자그대로 오리무중이었다. 안개와 비로 화산 준봉의 웅장한 풍경은 고사하고 10여 미터 앞의 계단도 흐릿하였다.

 

나는 일행이 앞서 떠난 줄 알고 부지런히 그들을 쫓아갔다. 쉬지 않고 앞만 보고 올라갔다. 올라가는 사람 보다 내려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앞사람의 엉덩이와 신발만 보였다. 구름만 가득하여 좌우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도룡묘(都龍廟)란 표지판이 보였다. 화장실과 작은 매점이 있었다. 혹시 나를 기다리지나 않을까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또 한참 올라가다 보니 창용령(蒼龍嶺)이란 푸른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있다. 나는 반가웠다. 사전조사를 통하여 이곳이 동봉, 남봉, 서봉으로 가는 갈림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단이 거의 수직으로 200m쯤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가 낮 1시 24분이었다. 계단은 생각한 것보다 가팔랐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머리를 앞 계단에 박고 자벌레처럼 기었다. 이 절벽은 화산 트래킹 코스 중 가장 힘들고 위험한 곳이다.

 

창용령에 올라서니 오운봉(五云峰) 휴게소가 지척이었다. 화장실도 있고 매점도 있으므로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내가 일행보다 앞서 왔다면 더욱 좋고, 내가 뒤쳐졌다 해도 나를 찾아 창용령을 내려가는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배낭에서 계란을 꺼내 먹고, 초콜릿 바도 두 개나 먹었다. 그때 나의 전화기가 울렸다. 김 대표였다. 서로 위치를 묻는데 상대방의 육성도 함께 들렸다. 김 대표가 나의 2m 전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가 두시쯤이었다. 김 대표가 말했다. “선생님이 급히 올라가시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30분이나 단축되었습니다. 모두가 긴장되어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김 대표는 잃었던 물건을 다시 찾은 듯 후련한 표정을 짓더니“제가 저 밑에서 선생님이 창용령 비탈을 올라가시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보았습니다. 비옷 등에 새겨진 커다란 상표와 자맥질하듯 기어 올라가는 키 큰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일본도를 꺾어 세워 놓은 듯한 절벽이 보였다. 서봉의 거대한 석벽이라고 한다. 그 것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금쇄관(金鎖關)을 넘었다. 간혹 오르막이 있었으나 길은 평탄하였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아기를 안은 엄마는 물론 구두에 핸드백을 든 부인도 있었다. 모두 서봉 삭도를 타고 온 사람들일 것이다. 비를 뿌리는 구름 속이건만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기쁜 표정이었다. 남천문(南天門)이라 쓰인 문을 통과하니 또 사당이 보였다. 근엄한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 뇌신전(雷神殿)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도교의 성지(聖地)답게 묘당(廟堂)이 참으로 많았다.

 

 

 

 

남천문을 지나자 평안종(平安鍾)이란 종각이 있고 그 옆으로 장공잔도의 입구라는 글자판이 바위에 붙어있다. 평안종이라! 이런 아슬아슬한 산꼭대기에 생뚱맞지만 그럴 듯도 하다. 장공잔도(長空棧道)란 바위벽에 구멍을 뚫고 통나무를 끼워 만든 공중에 뜬 길이다. 원(元)나라 시대에 하원희라는 도인이 4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전 한다. 이 잔도는 너비 한 자, 길이 100m쯤이라는 데 스릴만점, 조망만점이라서 젊은이들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면 이곳을 소개하는 사진과 글이 수 없이 많다. 평안종 자리에서 장공잔도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날씨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들고 있던 우산이 바람에 날려가자 “와”하는 함성인지, 비명인지가 들렸다.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평안종 아래 화장실에 들렀다가 매점에 들러 뜨거운 라면국물을 마셨다. 몸에 밴 한기가 사라지며 안도의 숨이 저절로 새나왔다. 남봉 정상에 올라 또 증명사진을 찍고 서봉삭도 입구에서 기다리던 일행을 만났다. 정확히 오후 3시였다. 삭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구름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거대한 절벽을 보았다. 윤 여사가 “정말 굉장해요. 삭도 값이 아깝지 않았어요.”한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바위산의 윤곽 전체를 즐길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구름에 가려 부분만 보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흥미로웠다. 테두리를 알 수 없는 유현함 속에서 상상력을 무제한으로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높고 발붙일 데가 없는 절벽에 이런 구조물을 어떻게 세웠는지 그 기술이 놀랍다. 승차권에 길이 4,211m, 철탑지지대 28개, 객차 84대가 초속 6m로 운행하는 세계 제1의 삭도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이 덕에 화산 영봉(靈峰)은 저자바닥으로 변했다. 옛 사람들은 겨우 바위에 구멍을 내 잔도나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쇠줄을 걸고 앉아서 단숨에 올라간다. 신선이 내려와 산다는 화산의 신비는 이제 사라졌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던 경건함과 간절함도 함께 사라졌다. 이것을 개발이라고 해야 할지, 파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홀가분하였다. 일부러 체력, 담력 테스트를 하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일정은 이제 다 치러냈다. 따뜻한 물로 땀을 닦은 다음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만찬자리는 흥겨웠다. 술을 하지 못하는 박 선생도 백주를 서너 잔이나 들고 노래도 흥얼거렸다. 내가 자벌레처럼 창용령을 기던 모습이 단연 화제였다. 김 대표도 은근히 걱정이 컸던 모양이었다.

 

아홉째 날

 

4월 19일, 토요일 한 낮, ‘까오티’편으로 서안북(西安北 시안베이)역에 도착했다. 바로 지하철을 타고 종루(鐘樓)로 갔다. 지하철은 작년에 개통되었다는데 들리는 말소리만 다를 뿐이지 서울의 지하철과 똑 같은 분위기였다. 종루거리는 사람과 자동차로 혼잡하였다. 10년 전, 여기에 왔을 때는 베이징 올림픽 준비로 도시전체가 부산했다. 도로를 넓히고 포장하고, 건물을 헐고 짓고 어수선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건물의 외양이나 사람들의 차림에서 옛날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서울이나 도쿄와 다를 바가 없다. 미끈미끈한 글래스타워에 명품 가방을 든 멋쟁이들이 활보를 하고 있었다.

 

서안은 서부대개발의 지휘본부이다. 서부란 이곳 섬서성은 물론 사천성, 감숙성, 청해성, 신장위구르 일대, 티베트 지방을 아우르는 말이다. 지금은 동해안지방에 밀려 주춤하지만 일단 개발에 탄력이 붙으면 중국대륙을 먹여 살리는 거대한 생산기지가 될 것이다. 그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티베트를 이곳 사람들은 서장(西藏 시짱)이라 부르는데 이는 서쪽의 거대한 창고라는 뜻이다. 티베트 고원의 지하에 어떤 자원이 얼마나 묻혀있는지 이제 슬슬 그 규모가 드러나는 중이고, 타클라마칸 사막에 어마어마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묻혀 있다는 것이 착착 확인되고 있다.

 

 

 

 

감숙성(甘肅省 깐수성)의 성도 난주(蘭州 란조우)에서 돈황(敦煌 둔황) 밖 옥문관(玉門關 위먼관)을 잇는 1,000km에 달하는 초원길을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황하 서쪽의 좁은 길이라는 뜻이다. 남쪽의 기련산맥(祁連山脈 치렌산)과 북쪽의 고비사막 사이의 좁고 기다란 초원지대이다. 좁은 곳은 겨우 1km, 넓은 곳이래야 100km미만이다. 평균고도 4,000m 안팎의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만들어진 초원이다. 하서주랑은 역대 중국 황제들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골칫덩어리였다. 흉노와, 돌궐, 위구르, 티베트 인들이 그 길로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바람 같이 나타났다 바람 같이 사라졌다. 농경민족인 중국인들은 그들의 기동력을 감당 할 수 없었다. 그 골칫거리가 이제 서부대개발의 대동맥이 되어 중국의 내륙과 신장 위구르, 우크라이나, 모스코를 거쳐 함부르크까지 이어주는 생명선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미 난주, 우룸치, 카스가르, 파미르의 쿤자랍패스를 넘어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관통, 인도양의 카라치에 이르는 길도 확보되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종루이다. 종루는 그 옛날 실크로드의 기종점(起終点)이기도 했는데 머지않아 그때의 성세(成勢)을 넘어설 것 같다.

 

이곳에서는 나흘 밤을 잔다. 워낙 유서 깊고 볼거리도 많은 곳이라 나흘도 부족할 듯싶다. 우리가 짐을 푼 호텔에서 비림(碑林)까지는 걸어서 30분이 채 안된다고 김 대표가 말했다. 성벽을 따라 서안의 이면(裏面)을 걸었다. 장의사와 약방, 안마시술소 같은 것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요일인데도 비림은 한가했다. 매표소 앞에서 일행은 망설였다. “무엇이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중국의 역사와 예술과, 시문, 학문이 있다. 하지만 한문을 읽을 수 있다 해도 전문가가 아니면 돌덩이로만 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림 담장 곁의‘비림거리’는 살아있었다. 붓, 벼루, 먹, 종이 등 문방사우는 물론 옥 제품, 나무 조각품, 청동주물 등을 파는 골동품, 기념품 가게가 1km도 넘게 이어져 있었다. 10위엔짜리 옥팔찌도 많았다. 10위엔 이라면 원화로 2,000원이 채 안 된다. 옥이 그렇게 쌀까? 가게 주인장은 옥팔찌를 서로 부딪쳐 보이며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플라스틱은 옥처럼 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문 쪽으로 빠져나와 한가하게 걷다보니 종루에 닿았다. 종루 서편 ‘이슬람거리’로 들어섰다. 을지로만한 거리에 사람들이 빽빽했다. 좌우로 음식점들이 어깨를 비비며 들어서 있었다. 면, 꼬치, 만두, 케밥, 엿, 석류, 그밖에 생전처음 보는 수많은 먹을거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고기를 빼먹고 버린 나뭇가지가 장 단지만한 플라스틱 통에 고슴도치처럼 꽂혀있다. 그런 통이 10m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고기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들의 악다구니도 요란하였다. 아마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자거리’의 뒷골목에는 옷과, 가죽제품, 가방, 액세서리, 골동품 등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없는 골목시장’이 숨어 있었다. 재주껏 바가지를 씌우고 재주껏 값을 깎는 묘기가 벌어지는 곳이다. 말이 전혀 필요 없는 곳이기도 하다. 계산기로 주인이 값을 찍으면 고객이 그 값을 지우고 싼 값을 제시한다. 한참 서로 밀고 당기고 흥정이 벌어진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이미 눈빛으로 고객의 속마음을 읽어낸 터라 절반으로 값을 깎아 주어도 돈이 남는다. 고객역시 절반 값에 횡재했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게 만드니 이곳이 과연 천당이 아닐까?

 

‘이슬람거리’는 이슬람교도들이 모여 장사를 하는 곳이라 술이 없었다. 그 거리를 빠져나가면 술은 팔지 않지만 술의 지참을 허용하는 이슬람 식당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꼬치구이와 ‘난’, 만두로 저녁을 들었다. 오랜만에 난을 다시 만났다. 난은 발효시키지 않은 밀가루 빵이다. 빈대떡 같이 생겼다. 터키에서부터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북서부까지 방대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주식이다. 갓 구어 낸 난은 바삭바삭하면서 고소하여 많이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맥주를 몇 잔하고 난에다 꼬치를 싸 먹었다. 양고기의 느끼한 맛이 없어졌다.

 

열흘째 날

 

4월 20일, 월요일. 화청지(華淸池)와 병마용(兵馬俑)을 보러가기 위해 서안역 광장으로 나가 버스를 기다렸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지만 이곳도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행선지를 알리는 팻말 별로 사람들의 긴 줄이 구불구불하였다. 버스가 도착하자 새치기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뒤에서 “파이두이, 파이두이!”하는 외침이 들렸다. 줄을 서라는 뜻이다. 어떤 청년은 새치기 하려는 사람을 잡아 끌어내기도 하였다. 기차를 탈 때나, 삭도를 탈 때나, 풍경구(風景區)를 들어 갈 때나 여기서는 줄을 서지 않으면 전쟁터가 될 것 같다. 서로 아귀다툼하느라고 다치기만 하고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썽 없이 살아가려면 상호양보와 상호존중은 실천하면 좋은 미덕(美德)이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규범(規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버스에 오르자 어떤 젊은이가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서울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내버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대접을 서안에 있는 동안 계속 받았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화청지는 실망스러웠다. 외곽을 으리으리하게 정비해 오히려 주인공이 초라해졌다. 일행이 또 물었다. “내가 본 화청지는 시골 연못이나 다름없었고, 장생전도 중학교 체육관만 했다. 장개석 총통이 연금되었다는 곳도 응접실이 딸린 별채에 불과하다. 모양으로 화청지를 보려한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말고 이제까지 간직한 이미지를 살리는 것이 좋다. 모양은 바깥이 훨씬 좋다. 비록 장한가(長恨歌)의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를 억지로 흉내 냈지만.”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은 10년 전 그대로였다. 외곽에 광장이 넓어졌을 뿐이었다. 두 시간이상 샅샅이 돌아보았다. 그때는 사진 촬영을 엄금해 카메라를 입구에 맡겨야 했는데 그 제한이 풀렸다. 인파도 작아 감상하기에도 좋고, 사진 찍기에도 편했다. 그 당시, BC 200년쯤이라면 한반도에는 아직 국가다운 국가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나타나고 철기문화가 꽃을 피워 농업생산이 급증했다. 이 점은 말없이 서 있는 병마용들이 증언해주고 있다. 저렇게 크고 정교한 토기를 구워낼 수 있으면 돌에서 쇠를 뽑아내는 기술도 탁월했을 것이다. 토기들과 함께 발굴된 창과 칼 등 무기와 마구(馬具), 전차(戰車)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토용(土俑)들의 표정이나 자세도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평범한 토기장도 이정도인데 뛰어난 장인들의 솜씨는 어떠할지 쉽게 짐작이 갔다.

 

열하루 째

 

4월 21일, 화요일. 하늘은 맑았으나 더웠다. 소안탑(小雁塔)을 보러 갔으나 정기 휴일이었다. 서운해 하는 일행들에게 나의 기억을 전해주었다. “이곳은 천복사(薦福寺)라는 황실의 원찰로 황태자가 즉위하기 전에 머물러 살던 잠저(潛邸)였다. 대안탑(大雁塔)은 현장(玄奘)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던 서고(書庫 Archive)이었고 이곳은 의정(義淨)법사가 가져온 경전을 보관하던 곳이다. 마당에 말고삐를 매어 놓던 돌기둥이 수십 개 서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새겨 넣은 짐승들의 모양이 아주 정교하고 익살스러웠다.”

 

섬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산시역사박물관))으로 갔다. 1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서안에 오면 놓치지 말고 꼭 들러야 할 곳이 여기다. 선사시대의 유물부터 하(夏), 상(商), 주(周), 진(秦), 한(漢), 남북조(南北朝), 수(隨), 당(唐)까지의 정치, 경제, 생활 모습과 그 유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전시해 놓았다. 중국에서 공식 인정하는 시대구분과, 나라, 지역, 부족들의 명칭 등 공부 할 것이 한정 없다. 여기도 사진촬영 제한이 없어졌다. 처음 이곳에 와서 받은 충격은 이번에도 되풀이되었다. 상(商)대의 청동기와 토기, 당(唐)대의 비단과 그림, 불상, 옥을 다룬 솜씨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기술(技術 Technology)은 지금 보다 못하지만 기예(技藝 Art)는 그때가 한 수 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좀 남아 대자은사(大慈恩寺) 행 버스를 탔다. 대안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대자은사는 커다란 공원으로 바뀌었다. 주변에 있던 주택과 상점들을 모두 쫓아내고 광장 같은 거리를 조성했다.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동상이 앞마당에 서 있고 그 뒤 매표소 건물을 넘어 대안탑의 절반이 보였다. 외부 광장의 위세에 눌려 절도 탑도 초라해 보였다. 대부분의 절이 공부하는 도량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전락 했다지만 그 위축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북방불교에 바친 현장 등 역경승들의 공덕은 불멸이라 할 것이다. 그분들의 번역이 없었더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스크리트 원전은 거의 다 멸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증명사진이나 찍자는 일행의 제의에 군말 없이 동의했다.

 

마지막 밤

 

마지막 날이다. 서안성벽을 둘러본 뒤 오후에는 쇼핑도 하고 짐도 싸기로 하기로 하였다. 이곳에서는 서안성벽(西安城壁)이라 부르지 않고 서안성장(西安城墻)이라 부른다. 담장이라는 뜻이다. 후한의 광무제가 장안(長安, 西安의 옛 이름)을 버리고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자 장안성은 퇴락했다. 이를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이 1374년부터 1378년까지 5년에 걸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아래 폭 18m, 위 폭 15m, 높이 12m, 총길이 13,7km의 장방형 형태이다. 중국에 남아 있는 옛 성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고 한다. 성벽은 모두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성벽과 해자 사이는 꽃과 나무가 심어진 아기자기한 공원이었다. 그 옛날 병사들의 주검이 켜켜이 쌓였던 곳이다. 노인들이 이곳저곳에서 태극권도 연마하고 스포츠댄스도 즐기고 있었다. 탁구장도 있고, 전통악기로 민요를 들려주는 곳도 있었다. 해자에는 유람선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혼인을 앞둔 예비부부가 기념 촬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역대 황제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태평성대의 모습이다. 이 성의 주문인 남문에 올랐다. 원래 이름은 영녕문(永寧門 영닝먼)이다. 영원한 평화가 들어오는 문이란 뜻이다. 문루에서 북쪽으로 종각이 보였다. 직선 도로가 뚫려 있고 양쪽으로 빌딩이 늘어서 있다. 동쪽의 문창문(文昌門)과 서쪽의 주작문(朱雀門)사이를 걸었다. 낡은 옛집의 모래톱 같은 검은 기와지붕이 초현대식 빌딩의 미끈한 몸체 사이에 끼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전동차를 타는 사람, 우리 같이 걷는 사람, 어느 백인 청년처럼 반바지로 뛰는 사람 등 가지가지였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트가 있었다. 넓은 매장에 옷과 식료품, 공업제품들이 골고루 진열되어 있다. 고객들이 별로 없어 한가했다. 카트를 밀고 다니며 각자 필요한 물건을 샀다. 주로 술과, 과자, 목이버섯 등이었다.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덕진 도자기 대처분, 지하철 공사로 폐업.’이란 붉은 글씨가 눈에 뜨였다. 경덕진(景德鎭 징더젠) 도자기는 한 때 유럽 귀족들의 품계를 정할 만큼 귀한 몸이었다. 지금도 그 명성은 녹슬지 않아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어 하는 명품이다. 가게에 들어서니 주인장이 졸다가 눈을 떴다. 양해를 구하고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까막눈인 나에게도 모양이나, 두께, 색깔, 문양 등이 얇고, 정교하고 깨끗하였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데 너무 싸서 믿어지지 않았다. “쩐더?(진짜냐?)”하고 물었더니 자기 명함을 보여주며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였다. 세관 통과가 어렵지 않느냐하였더니 그는 그냥 웃기만 하였다. 가짜라도 싸다는 생각에 꽃병하나, 물병 하나를 샀다.

 

저녁에 마무리 파티를 가졌다. 모두들 김 대표에게 감사를 드렸다. 이동 할 때 마다 김 대표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제대로 된 배낭여행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들로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기차, 버스, 택시, ‘빵차’, 그리고 오토릭셔를 타 보았다. 그 중에 제일 악동은 오토릭셔였다. 오토바이에 리어커를 연결한 것인데 차도건 인도건 닥치는 대로 달렸다. 이들은 꽉 막힌 길을 피해 가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위험했다. 패키지 관광을 했더라면 맛도 못 볼 경험이다. 고급 호텔에서 묵고, 리무진 코치를 타고 다니며 현지 안내원의 해설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은 서울 집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차이가 없다. 그 곳 주민들과 살갗이 부딪치는 접촉이 없으므로 아쿠아리움(Aquarium)의 유리통로를 걸으며 바다 생물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이제까지 그런 여행을 많이 따라다녔지만 이번과 같은 모험도 없고 경이도 없었다. 많이 느끼고, 많이 배웠다.

 

4월 23일, 목요일 새벽. 서안에서 함양(咸陽 시안양)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상쾌했다 시내 도로에는 어느새 물을 뿌려 놓아 먼지가 일지 않았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유럽 어느 도시의 외곽을 달리는 것 같았다. 가로수 대부분이 꽃나무였다. 잇따라 나타나는 과수원에는 하얀 배꽃이 만발했다. 지나다니는 차도 없어 경쾌하였다. 비행기에 오르니 서안에서 청도까지 두 시간, 청도에서 인천까지 한 시간이었다. 열흘이틀동안 지나다닌 곳을 단 세시간만에 끝냈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 마당 귀퉁이에도 모란이 만개했다. 이 모란도 아마 그 옛날, 신라 선덕여왕 때 낙양에서 시집온 것일 것이다.

 

 <文白. 2015년 5월 2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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