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4. 21:14ㆍ카테고리 없음
2015년 4월 11일부터 4월 23일까지 중국의 청도, 개봉, 정주, 태행산, 낙양, 화산, 서안을 배낭여행하였다. 일행은 윤 선생(75), 박 선생과 필자(73), 임 선생과 김 선생(72), 이 선생(71), 윤 여사(70), 정 여사(69) 등 여덟인데 박 선생과 윤 여사, 임 선생과 정 여사는 내외지간이다. 다 같이 30대에 같은 직장을 다닌 인연으로 여태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오찬회동을 갖는 40년 지기들이다. 처음에는 지원자가 20여명에 달했으나 배낭여행의 고단함을 뒤늦게 깨달은 탓인지 10명으로 팍 줄었다. 그나마 단체비자가 발급되고, 항공편과 철도편 예약이 끝난 뒤, 두 사람이 또 포기하는 바람에 여행 자체가 무산될 뻔하였다. 다행히 ‘투어 인 케이 씨’김광철 대표의 호의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김 대표가 직접 안내도 맡아주었다.
첫날
4월 11일 토요일, 낮 12시 쯤 인천을 떠난 비행기는 기내식을 마치자마자 청도(靑島 칭따오)에 내렸다. 불과 한 시간 남짓이었다. 김 대표는 우리를 세 팀으로 나누더니 “택시를 타고 청도 기차역 앞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임 선생 내외분과 한 팀이 되었다. 우리들의 중국어 실력은 겨우 “니 하오?”정도의 수준이었으므로 불안하였다. “택시 요금이 얼마나 되느냐?”고 김 대표에 물었다. “90위엔 정도인데 대중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김 대표는 그 말을 남기고 매정하게 먼저 떠났다. 나는 갑자기 낯설고 혼잡한 시장 한 복판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친 어린 아이 꼴이 되었다. 그제야 이번 여행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마 깃발관광이었다면 현지안내원이 입국장에서부터 우리일행을 기다리다 리무진 버스에 태웠을 것이었지만.
청도역은 해안가에 있었다. 택시기사가 미터기의 요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75위엔이 표시되었다. 100위엔을 낸 팀도 있었다. 일부러 바가지를 씌운 것이 아니라 길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행이 모두 무사히 도착하자 배낭을 식당에 맡기고 바닷가를 둘러보았다. 주말이라서인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차림은 청회색 일색으로 개성이 없었으나 표정은 밝고 당당하였다. 빌딩 숲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유럽풍 성당이 이곳이 옛날 독일의 조차지였다는 것을 떠 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시원하고 깨끗했다. 잡맛이 없었다.
저녁밥은 더 훌륭하였다. 뒷골목의 조촐한 식당이었지만 나오는 음식은 하나 같이 맛있었다. 음식을 고른 김 대표의 안목도 밝았겠지만 조리 솜씨도 뛰어났다. 목이버섯과 두부, 돼지고기, 만두 등 예닐곱까지 접시가 잇따라 나왔는데 모두 싹싹 비웠다. 칭따오 맥주도 식욕을 돋웠다.
오후 5시 반 개봉(開封 카이펑)행 열차가 역 구내로 서서히 접근했다. 객차 옆구리에 장춘(長春 창춘)에서 서안(西安 시안)까지라는 표시가 붙어있다. 장춘은 만주 길림성(吉林省 지린성)의 성도이고 서안은 서쪽 섬서성(陝西省 산시성)의 성도이니 만주에서 중원을 관통하여 실크로드의 기종점을 연결하는 장대한 노선이다. 이 열차는 우리나라의 무궁화 급이라는데 연결된 객차가 스물 쯤 되는 것 같고 길이는 200m가 넘을 듯하다. 객차마다 전담 승무원이 한 사람씩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6인용 침대칸에 각각 자리 잡았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세 개씩 벽에 붙어 있었다. 의외로 깨끗하고 조용하였다. 내 아래 자리는 윤 선생이고 위와 맞은편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인들과 한 방에서 자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고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우리들이 떠드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한 듯하였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맥주를 몇 잔 마시다 침대로 올라가 옷 입은 채 그대로 누워 내처 잤다. 전혀 불편이 없었다. 열차에서는 앉아 가는 사람, 서서 가는 사람, 누워가는 사람 등 차별이 있겠지만 차에서 내리면 그런 불평등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둘째 날
4월 12일은 일요일이었다. 아침 7시 쯤 개봉역에 도착했다. 날씨는 잔뜩 흐려 비가 내릴 듯하고 바람에 흙먼지가 날리며 제법 쌀쌀하였다. 서울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얇은 스웨터 위에 바람막이 겉옷을 걸쳤다. 역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젊은 사내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해준다. 아마 자기 차를 이용해 달라거나, 자기 식당에서 조반을 들라는 권유인 것 같다. 김 대표는 그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큰길을 건넜다. 길가의 허름한 밥집에서 아침을 들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앞치마에 땟국이 줄줄 흐르고 그릇들도 새카맸고 바닥도 지저분했다. 하지만 따뜻한 죽과 갓 쪄낸 만두는 새벽의 추위와 허기를 다스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송나라 시대의 거리(宋都御街)’를 어슬렁거리며 오토바이에 어린이들을 싣고 달리는 젊은 주부들을 바라보며 책방과 약방, 노상 음식점 등을 구경하였다. 색다른 것은 없었으나 땅콩에 버무린 엿은 아주 달고 고소했다. 길 끝에 용정(龍亭)이 자리 잡고 있는 데 마침 봄 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용정은 송나라가 여진족에 밀려 양자강 남쪽 항주(抗州 항조우)로 쫓겨날 때까지 황제가 머물던 대궐 터였다. 수백 가지의 꽃으로 길가를 장식하고 커다란 아치를 만들어 세웠다. 사람구경, 꽃구경에 다리 아픈 줄을 몰랐다.
점심을 들고 나자 세찬 바람과 함께 찬비가 내렸다. 비옷을 꺼내 입고 개봉부를 보러 갔다. 마침 대청에서 인기 드라마 ‘포청천’의 한 대목을 실연해 보이는 연극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포청천이 황족의 죄상을 밝혀내고 그를 처단하라는 호령이 떨어지자 마당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윤 여사와 정 여사는 황족으로 분장한 그 배우와 기념 촬영도 하였다. 호텔 근처 재래시장을 둘러보았다. 옷가지와 모자, 신발, 전자제품, 식료품 등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으나 대부분 물건들이 조잡하고, 흥정하는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윤 여사는 오늘 칠순을 맞았다. 객지에서 맞는 이 뜻 깊은 날을 자녀들을 대신해 축하해 드려야겠는데 아이디어가 궁색하였다. 할 수 없이 커다란 수퍼마켓(超市 차오스)에 가서 케이크와 술과 과일, 과자 등을 쇼핑했다. 길거리 시장에서는 흥정이 통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엄격한 정찰제로 전혀 에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주 근사한 케이크가 100위엔, 스페인 산 포도주는 15위엔, 사천(四川 쓰촨)산 백주(白酒 바이지우)가 10위엔, 무게로 달아 파는 팔뚝만한 망고도 거저나 다름없었다.
저녁은 신선로 비슷한 화과(火鍋 훠구어)로 정했다. 우리나라에는 사브사브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끓는 물에 양고기와 채소를 데쳐먹는 중국전통 요리이다. 윤 여사의 머리에 화관을 쓰여 드리고 케이크에 불을 붙인 뒤 축하 노래를 불렀다. 윤 여사는 포도주를 한 잔 마시더니 “오늘 저녁 파티로 기운을 얻어 태행산 트래킹을 기필코 완주하겠다.”고 씩씩하게 선언하였다. 자녀들이 마련하는 칠순 잔치를 마다하고 이번 여행에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무릎이 아파서 일행에 폐가 될까봐 걱정이 큰 모양이었다.
셋째 날
4월 13일 아침, 대상국사를 들러 보고 정주(鄭州 정조우)로 떠났다. 대상국사는 송나라 황제들의 원찰이었다지만 스님들은 보이지 않고 관광객들만 들끓고 있었다. 저자거리나 다름없었다. 11시 반 쯤 역으로 나가 열차 편으로 정주로 떠났다. 정주(鄭州 정조우)는 하남성(河南省 허난성)의 성도로 인구 천만을 상회하는 중국 내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아직도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 시대의 유적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을 만큼 유서 깊은 도시이다. 황하 남쪽에 펼쳐진 광활한 황토 곡창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하장이기도 하다. 중국의 지리상 중심지는 황하 상류의 난주(蘭州 난조우)라지만 그 것은 티베트 고원,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 사막 등 불모지를 다 포함 할 때의 이야기이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을 기준으로하면 황하의 중하류인 바로 이곳이 중국의 배꼽이라 할 것이다.
도시 한복판에 ‘2.7기념탑’이 높이 솟아있다. 1923년 2월 7일 경한철도 노동자들이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봉기 했으나 군벌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되었다. 중국정부는 폭압에 저항한 노동자들의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6년 6월, 이탑을 세웠다고 표석에 새겨 넣었다. 서울의 명동 같은 곳으로 아주 크고, 넓은 거대한 쇼핑 몰과 푸드 코트가 조성돼 있었다. 점포마다 확성기로 불러대는 호객소리에 귀가 멍멍하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청춘들은 표정도 밝고 차림도 세련되었다.
넷째 날
4월 14일,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빵차’라고 부르는 7인승 밴을 타고 태행산으로 가는 도중 ‘황하유람구(黃河遊覽區)’에 잠깐 들렀다. 아침 8시쯤 호텔을 떠났는데 마침 출근시간이라서 자동차, 오토바이, 릭셔, 자전거 등으로 6차선도로가 가득 찼다. 바퀴 달린 것들은 모두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9시 조금 지나 황하유람구에 도착했다. 서울의 남산만한 작은 산의 꼭대기에서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거대한 석상이 황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염제는 다른 이름으로 신농씨(神農氏)라고 불리는 ‘불의 신’으로 농사짓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하고 황제는 다른 이름으로 헌원씨(軒轅氏)라고도 불리는데 최초로 부족을 통일하여 법과 제도를 정비한 제왕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이들이 실존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두 석상이 자리한 곳에서 내려다 본 황하는 정말 황토 빛에 넓고 길어 유장하였다. 기다란 열차가 철교를 느릿느릿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산의 중턱, 한갓진 곳에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모자상이 보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황하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 같다. 황하는 티베트고원 어디에선가 시작되어 도중에 크고 작은 강의 물을 받아 점점 불어나면서 중원 대평원에 물을 대 사람과 짐승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어머니와 다를 바 없겠다. 인도 사람들도 갠지스 강을 ‘어머니의 강(Mother Ganga)'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황하는 때때로 범람하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황하의 물 관리는 역대 통치자들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다.
광장 한 귀퉁이에 작은 박물관이 있었다. 황하가 만든 황토지대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중원 전체가 거대한 황토지대이고 사람들은 황토에서 태어나 황토 속에서 살다 황토로 되돌아간다고 쓰여 있었다. 황토층에서 발견된 고대 동물, 식물들의 표본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거대한 코끼리를 닮은 짐승의 머리뼈와 상아, 구석기시대 인들이 쓰던 돌로 된 연장, 신석기 인들의 토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 ‘빵차’의 기사는 김 대표가 탄 차를 따라가지 않고 포장도 안 된 황톳길을 무작정 달렸다. 우북하게 자란 밀밭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먼지가 얼마나 심했던지 뒷자리의 정 여사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중국말을 할 줄 몰라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은근히 불안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곳곳에 도로가 파헤쳐지고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었다. 신향(新乡 신시양)이란 곳을 지날 때는 널찍널찍한 도로에 고층아파트, 고층빌딩 건설현장이 여러 군데 보였다. 해안지방에 밀려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이곳도 이제 개발의 급류를 탄 것 같다. 한 때 이곳은 베이징, 상하이, 광조우의 부족한 일손을 보충해주는 농민공(農民工)의 최대 공급지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옛날 역대 왕조들의 도읍지로서 누리던 영화를 되찾을 것 같다.
운태산(云台山 윈타이 산)이라는 간판이 보이면서 차는 산속으로 들어섰다. 길은 포장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주 깨끗하고 넓었다.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길가에 민박집 간판만 자주 보였다. 태행산에 들어선 것 같다.
태행산(太行山 타이항 산)은 남북 약 600km, 동서 약 250km에 달하는 거대한 산괴(山塊)로 넓이가 남한 땅 전체에 필적한다. 이 산괴는 운태산, 구련산, 만선산, 천제산, 왕망령 등 1,000m 또는 2,000m를 넘나드는 수많은 산들을 품고 있다. 이 산괴의 동쪽을 산동(山東)이라 부르고 서 쪽을 산서(山西)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중원을 차지하려고 패권을 다투던 세력들이 세 불리하면 이곳으로 숨어들어 세력을 보충한 뒤 재기를 노렸다.
유방(劉邦)이 한(漢)을 세운지 200여년쯤 지나자 외척 왕망(王莽 BC45-AD23)이 어린 황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선양 받은 다음 국호를 신(新 8-24)으로 바꿨다. 왕망은 토지개혁과 세제혁파로 민심을 얻으려 애를 썼으나 오히려 개혁에 실패해 여러 곳에서 백성들이 저항했다. 유방의 9세손, 유수(劉秀 BC6-AD57)도 봉기했으나 왕망의 군대에 쫓겨 바로 이곳 태행산으로 숨었다가 세를 불린 다음 왕망을 격파하였다. 유수는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을 버리고 낙양(洛陽 뤄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한(漢)을 계승하였다. 그 가 후한(後漢)을 연 광무제(光武帝)이다. 현대에 들어서 모택동(毛澤東 1893-1976)도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군에 밀려 이곳으로 패퇴했다가 주덕(朱德 1886-1976)과 합세해 재기했다. 일제시대,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金枓奉 1889-1960)과 무정(武亭 1905-1952)도 이곳에서 항일전투를 벌였다하니 우리와도 인연이 없지 않다.
오후 2시, 팔리구(八里溝)와 구련산(九蓮山)이 갈라지는 곳에 도착하여 점심을 들었다. 젊은 남녀들이 술을 마시다 우리들을 보더니 함께 사진을 찍자고 말을 걸었다. 그들의 모델노릇하기에는 너무 늙어서 사양했더니 자꾸 조른다. 그들의 입에서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도시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팔리구 탐방은 버리고 바로 구련산으로 들어갔다. 경상도 아주머니들의 사투리가 왁자지껄하였다. 그분들은 나오고 우리들은 들어갔다. 안내판 마다 중국어와 한글로 해설을 붙였다. 하지만 한글은 문법도, 어법도 틀려 이해하기 힘들었다. 좌우로 수백 미터가 넘을 깎아지른 절벽이 길고 좁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었다. 고개를 냅다 제켜야 손수건만한 하늘이 보였다. 엷은 홍색을 띤 바위가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황하 유람구의 염황제 상을 쌓은 붉은 돌들은 모두 이곳에서 떼어내 간 모양이다. 한 줄기 커다란 폭포가 보이자 골짜기는 끝나고 기다란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가계(張家界)에서 보았던 그런 것인데 길이는 좀 짧은 것 같다. 김 선생은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혼자서 계단을 걸어올라 갔다. 30분쯤 걸렸다고 한다.
위에는 서련사(西蓮寺)와 사하촌(寺下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달구지나 지나다닐 수 있는 시멘트 길에 복사꽃이 화사하고 낮닭이 울었다. 하지만 서련사 입구에 다다르자 시장바닥처럼 북적거리고 소란하였다. 나이든 참배객들로 좁은 절 마당이 빽빽하였다. 향연과 그 냄새가 불당에 가득했다. 서련사는 광무제의 목숨을 구해준 서련노모(西蓮老母)를 기리기 위해 동한시대(東漢時代)에 처음 지었으나 도중에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다. 현재의 당우는 70년 전에 지은 것이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부처님 이외에 서천노모(西天老母) 등 여러 속신을 함께 섬기고 있었다. 황하의 모자상에서 보듯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이 강한 것 같다.
참배객들은 거의 전부 노인들인데 차림은 남루했으나 하나같이 간절한 얼굴로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있었다. 대부분 할머니들인 것으로 보아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것이 틀림없다. 서련노모, 서천노모는 전각에 앉아 서 절을 받는 돌덩이들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서 땅바닥에 머리를 대는 할머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집들은 다 같이 작고 아담했다. 땅이 좁아서 더 크게 지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서련사 위쪽으로는 연못(池)과 못(潭)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번갈아가며 계속 나타났다. 작은 골짜기가 꽤 깊은 듯하다. 이곳의 물이 모여 엘리베이터 옆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참배객들은 절에서 보시하는 만두와 죽을 노상에서 먹은 뒤 이불보따리를 안고 하루 밤을 샐 민박집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큰 방에서 함께 모여 자는데 숙박비는 1인당 10위엔 정도라고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묵을 산장은 호사였다. 비록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엉성한 방이었지만 뜨거운 물이 나오는 화장실에 보송보송한 침대가 있었다. 밤에는 제법 추었으나 옷을 잔뜩 끼워 입었으므로 아무 탈 없었다.
다섯째 날
4월 15일, 수요일 새벽. 따뜻한 죽과 만두로 요기를 한 다음 서련사를 나섰다. 오늘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구련산 트래킹이 있는 날이다. 점심용으로 빵과 계란부침을 한 개씩 사서 각자 배낭에 넣었다. 천문(天門), 천문골(天門洶), 천제(天梯) 등의 입간판이 잇따라 보이더니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면서 흙길이 나타났다.
아침 7시였다. 언뜻 보기에는 폭 1m 안팎의 평범한 산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수백 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의 꼭대기다. 개나리는 이울고, 복사꽃 살구꽃이 한창이다. “제가 이곳을 여러 번 찾았지만 오늘처럼 파란 하늘은 처음 봅니다.” 김 대표는 이렇게 말하면서 서련사 방향의 스카이라인을 여러 컷 찍었다. 왼쪽으로는 백여 미터쯤 되는 산꼭대기에서 바위가 부서져 흘러내리고 키 작은 나무들이 이제 막 연두색 이파리를 내밀고 있었다. 오른 쪽은 아찔한 절벽이다. 엘리베이터 탑승구의 자동차가 콩알만 하게 보였다. 허리께 닿는 잡목에 가려 벼랑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쩌다 절벽 바닥이 보이면 저절로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스했다. 다들 바람막이를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썬 글라스를 꺼내 썼다. 아마 절벽 저 쪽에서 이쪽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우리들이 허공을 걷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길은 계속 평탄하였다. 하지만 간혹 갑자기 좁아져 건너뛰어야 할 곳이 종종 나타났다.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틈이 생긴 것이다. 이런 곳은 대개 시야가 탁 트여 아래 위가 다 잘 보였다. 등골이 서늘했다. 여염집도 가끔 나타났다. ‘누가 뭐 하러 이런 곳에 와서 사는가?’한심하지만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길 위에 염소 똥만 소복 할 뿐이었다. 산신각도 두어 채 보였다. 벼랑 쪽 수직 절벽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놓았다. 가끔 서울에서 팔리는 인삼사탕과 초콜릿 껍질이 보였다. 공연이 부끄러워져 보이는 대로 주어 담았다. 이곳 사람들도 안 버리는 것을 하필 예까지 와서 버리다니!
다들 씩씩하게 잘 걸었다. 세간쯤 지나자 공포도 어느 정도 가시고 긴장도 풀어졌다. 서로 농담도 나누고 웃으며 노래도 불렀다. 걱정했던 윤 여사도 잘 따라 왔다. 윤 여사는 등산용 스틱을 가져가서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은 없었으나 절벽 길은 한도 없이 이어졌다. 드디어 염소 떼를 만났다. 그 녀석들은 느닷없이 자기들 영역을 침범한 우리를 못마땅한 듯 노려 보다 왼쪽 산위로 피했다. 염소치기도 한 사람 만났으나 그 역시 우리를 소 닭 보듯 하였다. 그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염소들과 똑같이 누비고 다녔다.
오후 1시, 경구북대문(景區北大門)을 무사히 빠져나와 제법 큰 마을에 들어섰다. 민박집 간판이 군데군데 보이고 자동차가 서 있는 집도 많았다. 정확하게 6시간 걸렸다. 휴식시간과 점심시간을 감안 하더라도 시간당 2,5km는 걸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은 절벽 길은 15km 정도가 될 것이다. 마을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였다. 무사히 트래킹을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하늘을 훨훨 날 것 같았다.
‘빵차’로 왕망령풍경구로 가서 셔틀버스 편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곳이 태행산의 중심이고 해발 1,700m로 가장 높은 곳이라 한다. 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시야가 흐리다는데 오늘은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 그야말로 산봉우리와 계곡이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었다. 산봉우리 둘레 길을 1km가량 걸었다. 천제산, 운대산, 만선산, 구련산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떠 있었다. 관광객도 우리들뿐이어서 호젓하였다. 소나무가 많아 솔 향이 짙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나무순이 모조리 부러져 하얗게 부러진 자리가 드러나 있었다. 바람과 눈 때문이라고 하니 눈보라가 칠 때의 이곳이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오후 4시쯤 왕망령을 내려와 만선산(萬仙山) 절벽장랑(絶壁長廊)을 통해 곽량촌(郭亮村)으로 향했다. 절벽장랑이란 바위를 뚫어 만든 1,250m에 달하는 좁은 터널이다. 까마득한 바위절벽에 ‘빵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굴을 뚫고 군데군데 사각형의 창을 내 조명과 통풍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였다. 곽량촌의 청년 12명이 1972년부터 1977년까지 곡괭이와 정 등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뚫어서 만들었다는데 도무지 그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못지않은 놀라운 일도 목도하였다. ‘빵차’를 타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바위창밖으로 간간이 보이는 아찔아찔한 풍경에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스포츠유틸리티(SUB)가 나타났다. 서로 피할 데가 없었다. 좁은 통로가 구불구불하여 우리 차가 입구까지 후진 할 수도 없고 앞 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내려 서로 다투더니 우리 차의 기사가 천천히 후진하면서 약간 넓은 틈새를 발견하자 두 차가 글자그대로 간발의 차이로 비켜갔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엄지를 추켜올리면서 “쩐빵!”을 연발했다. 우리 차 기사는 쇳덩어리로 된 자동차를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그것도 폐차 직전으로 보이는 고철덩어리를!
곽량촌 역시 서련사 사하촌 마냥 절벽 위 동네였다. 그러나 서련사처럼 고립된 곳이 아니라 관광버스가 줄지어 다닐 정도로 세상과 바로 연결된 곳이었다. 마을 어귀부터 마을이 끝나는 곳까지 1km도 넘을 길가에 조립식 가게를 약간의 틈새도 없이 이어 짓고 있었다. 불이라도 나면 한꺼번에 다 타버릴 것 같다. 바야흐로 수백 년 동안 속세를 떠나 있던 ‘도화촌(桃花村)’이 급속도로 세속화되고 있는 중이다. 마을 주변에 스케치하는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원래 산수가 뛰어난 곳이라 화가 지망생들이 일 년 내내 단체로 찾아온다고 한다. 절벽장랑, 절벽 길, 스카이라인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여러 곳 둘러보았지만 이제 그 풍경도 심드렁해졌다. 구련산 절벽 길을 걸으면서 그 보다 진한 경치를 눈이 시리도록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고 내일 아침 정주로 내려간다. 산장의 객실은 천장이 높고 낡았으나 뜨거운 물은 잘 나왔다. 그러나 나는 샤워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섯째 날
4월 16일 목요일 아침 9시, 다시 정주로 향하였다. 하늘은 맑았으나 약간 더웠다. 산에서 내려와 1차선 도로에 들어섰다. 오르막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나고 가끔 터널도 지났다. 온갖 종류의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렸다. 버스, 택시, ‘빵차’, 대형 탱크로리, 컨테이너보다 더 큰 짐을 실은 화물 트럭 등. 매연과 먼지와 석유냄새가 진동했다. 길바닥은 파이고 갈라지고 성한 데가 없었다. 대형트럭들이 무거운 짐을 싣고 연락부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 읍내는 자동차정비소, 농기계 고치는 곳, 음식점, 잡화상, 버스터미널 등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신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이자 새로 닦은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그제야 답답한 흐름에서 벗어나 경쾌하게 달렸다. 차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도 있었다. 긴장이 풀어져 졸음이 오려는 순간, 오른쪽에서 갑자기 삼륜트럭이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질러 갔다.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한 것이다. 기사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중앙선을 넘어 반대 방향의 차도로 넘어갔다. 만일 그 쪽에서 달리는 차가 있었더라면 우리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뒷자리의 정 여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기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중앙선을 넘어와 태연하게 달렸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향 시내에서 또 한 번 아찔했다. 네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데 맞은편의 버스가 직진하면서 우리의‘빵차’로 달려들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에 비하면 어제의 절벽트래킹은 아이들 장난이라 할 것이다. 위험은 산속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 있었다. 길바닥에 노란 색과 흰 색으로 차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건만 차도, 사람도 그 생명선을 지키지 않았다. 신호도 무시하고 아무 때나 길을 건너고 좌회전을 예사로 감행하였다. 교통경찰도 빤히 보고 있으면서 단속을 안 했다. 자동차들은 서로 달려들다가 부딪칠 듯 하는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사람들도 빨간불 초록 불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로를 무단 횡단하였다. 그러나 절대로 뛰는 법은 없었다. 뛰면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사람이나, 차나, 경찰이나, 칼 같이 신호를 지키는 것 보다 이렇게 기회를 봐서 요령껏 피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치부하는 것 같았다.
신향 역에서 볶음밥과 우육탕면 등으로 각자 점심을 든 뒤 기차로 갈아타고 정주로 떠났다. 열차는 믿음직했다. 호텔로 들어가 우선 샤워를 한 다음 밀린 빨래를 했다. 젊어서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닌 임 사장이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빨래를 짜서 그냥 걸어놓으면 방바닥에 물방울만 뚝뚝 떨어질 뿐 잘 마르지 않는다면서 빨래를 목욕 타월에 잘 펴서 돌돌 감아 발로 밟아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물기가 쫙 빠져 금방 마른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또 제일 연장인 윤 선생의 생일이었다. 윤 선생은 따님들이 미국과 프랑스에서 축하 방문을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번 여행에 따라나섰다. 그래서 틈만 나면 문자서비스와 ‘카톡’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문자서비스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 무료로 제공되었지만 ‘카톡’은 와이 파이 지역에서만 가능했다. 이곳 호텔은 어느 곳에서나 와이 파이에 잘 연결이 되었다. 윤 선생은 호텔 방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먼저‘카톡’으로 손자, 손녀들과 음성통화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이곳 사진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 소식도 자세히 취재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었다. 해질녘 차오스에 가서 생일파티에 쓸 물건들을 준비를 한 다음 ‘2,7기념탑’ 근처 식당에서 또 ‘훠구어’를 들었다. 윤 여사와 정 여사가 축하 노래를 불러드렸다. 윤 선생은 생일 파티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서울 따님들에게 보냈다. 참 놀라운 세상이다. 시간과 공간의 틈이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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