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김명혜

2010. 4. 3. 18:26카테고리 없음

봄이 채 오기도 전에 여름을 재촉하던 날을

오늘 이 비가 차분하게 앉혀 놓았습니다.

물안개가 계곡을 덮고 있는 걸 보면 쉬이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알려 주신 지혜 중 하나입니다.

 

비구름이 산 위로 오르면 곧 날이 맑아질 것,

바람이 부는 날은 비가 오지 않을 것,

잠자리가 낮게 날면 날이 흐릴 것...

과학이 뭔지 모르는 어머니는 자연(自然)선생님이 알려 주신

지혜를 배웠던 것이었습니다.

 

물안개를 보니 한 달 전 모습이 기억났습니다.

 

겨우내 냉기와 온기가 거듭하면서

계곡물은 단단한 얼음장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얼음장은 따듯한 날이면 조금씩, 조금씩 녹아 없어질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밤사이 부슬 부슬 비가 내리더니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얼음장이 소리없이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골짜기마다 스며 나온 물기들은 물줄기로 합류해 내닫고

갈라진 얼음판들은 미처 물살에 합류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 채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 커다란 얼음판들이......

다만 작은 조각만이 물을 따라 흐르다 바위틈에 끼여 걸리기도 하였지만...

 

그리고 한나절 물안개가 계곡 위를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멋진 광경을 선생님과 함께 보았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물안개 오르던 계곡의 모습도 생생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사건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혁명”이란 단어의 새로운 개념 정리.

그 날, 비가 내리기 며칠 전 즈음하여

얼음장 밑으로 흐르던 물이 용암이 끓는 듯

소리를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한겨울엔 그 소리가 크지 않아 쉽게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아! 얼음 밑으로 물이 많이 녹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징조였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루 아침

계곡을 덮고 있던 얼음장판은 일제히 갈라지고

밑에서 불어난 물줄기에 더 견뎌내지 못하고 일어서다,

내닫는 물살에 다시 합류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았던 것입니다.

 

‘혁명이란 것도 이런 것일 게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얼음장을 뒤엎는 일이 생겨나도,

그 기존의 세력, 가치, 관념 따위는 변혁의 물살을 따르지 않죠.

다만 그저 가라앉았다가 더디게 변하거나 흐르다 바위틈 사이에 낀

얼음조각처럼 잔존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