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언론 역사 증언 진술서--1

2009. 11. 17. 18:22카테고리 없음

구술 증언채록 질문지

김양래


1. 선생님께서 최근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이 내용은 제가 최근 3년간 동대문구 숲해설가로 자원봉사 활동중이므로 저의 이력을 적은 글을 여기에 전재합니다...

나는 우리나라 해방 전에 태어나 역사의 소용돌이를 모두 겪은 사람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일선에서 은퇴하여 현재는 조용히 노년을 지역 자원봉사와 자연 숲해설과 산악대장과 중국어 강좌와 컴퓨터 익히기 공부를 하고 있으며, 무슨 일이든지 건전한 정신과 신체를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사는 서민입니다.


동대문구에서 자원봉사 활동실적을 확인 받은 대로 나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127시간 자원봉사를 하였고, 구청의 상담가 교육, 서울시의 자원봉사자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여 많은 관내 유지들과 유대관계를 갖고 있으며 우리 아파트의 동대표로 재직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동대문 케이블 방송(티브로드)의 시청자 제작팀의 뉴스 앵커로 활약하고 있어 더욱 동대문구의 발전과 자연보호에 앞장서서 일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언론계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흐름과 역사를 피부로 직접 경험하여 이제는 그 잠재력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남을 돕고, 사회를 보다 밝고 깨끗하게 하게 하여 선진국으로 만드는 게 나의 꿈입니다.

먼저 의식혁명을 강조합니다. 주인의식, 배려와 통합의식, 글로벌 선진의식으로의 개혁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일부터 나부터> 의식개혁에 앞장 서야 합니다. 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설한 흥사단의 단우로서 50여년을 살아와서 자주정신과 애국심이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길을 가거나 산에 등산을 하면서도 쓰레기를 주워오는 친환경론자로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나는 원래는 산악인입니다. ‘한국의 산하’ 인터넷에 전국의 산행기를 올린지 10년이 되며 작년에는 야생화공부를 마치고 백두산야생화사진 대회에 참가하였고 독도, 울릉도 현지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편 최전방 DMZ의 자연생태 교육에도 참가하였습니다.

국민대학교에서 2007년 숲해설가 교육을 받고 나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 40년 등산 인생을 마지막으로 나무와 숲과 공기와 물의 중요성을 새로 인식하게 되어 새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과거의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니고 현재 내가 사회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남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공부와 21세기에 맞는 학습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즐겁게 전념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작성자             일죽  김양래


2. 선생님께서는 1967년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시고 1969년에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입사하시게 된 동기나 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대학에서 학훈단 5기로 졸업하고 곧바로 장교로 복무, 2년간 군대를 마치고 그해에 12기 기자로 입사하였고요... 군에서 DMZ 전방생활을 하면서 전우 신문에 글을 쓰기도 하면서 당시 신동아에서 모집한 다큐멘터리 응모를 위해 최전방 군생활의 애환을 담은 일기를 써가며 언론사에 취직을 할 생각을 가지고 제대했습니다. 대한무역진흥공사, 은행 등 여러 군데 원서를 냈으나 낙방하였고, 그해 12월 동아일보사에 출판국 기자로 입사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저의 집은 선친이 금융계 (은행, 증권회사) 임원으로 평탄하게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대학졸업을 하기 전에 지금의 새만금 사업같이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을 벌이다가 대홍수로 인해 바다에 쓸리는 비운을 맞아 하루아침에 파산을 하여 생게가 곤란한 지경에 일러 한시바삐 장남인 제가 돈을 벌어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3. 당시 언론사에 같이 입사한 동기나 친구 분들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보충질문. 대학시절 혹은 학창시절 선생님께서 참여 하셨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하신 기억나시는 일화나 사건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 선배들이 신문사에 많이 진출하여 저의 동경 대상이었고요. 그런데 공부를 많이 못해서 시험 삼아 본 것입니다. 재학시절  외대학보에 졸업논문(니이체의 인간과 사상) 등 원고를 보내 게재한 적이 있었으나 대학신문 기자는 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입사한 12기 동기는 전 외대교수 고 김진홍, 현재 15년째 병상에 누운 국흥주, 이종욱(2), 김동현, 임부섭, 유영숙,나 7명이며 75년도에 모두 해직되었습니다.








5. 1972년 11월 23일 이른바 ‘유신헌법’이 확정되기 이전부터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각 언론사 편집국에 상주하다시피하면서 언론을 마음대로 통제했다고 하는데, 1970년대 초반 당시의 언론제작 상황 및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는 최고의 신문인 동아일보가 반정부 기사를 쓴다는 판단을 내리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언론탄압이 자행되었습니다. 제가 출판국에 근무할 때 소위 <신동아 필화 사건>으로 천관우국장, 손세일부장 ,이정윤 차장 등 관련 책임자가 여러 차례 정보부와 보안사에 불려갔으며 매일 비상이 걸린 사무실에서 근무하였고, 여성동아부로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문보다도 먼저 잡지에 손을 대어 기사 한자 한자 검열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10. 1974년 3월 6일 동아노조가 설립되게 되는데요. 이후 노조 임원 전원 해고와 노조 활동 금지와 해고된 노조 임원 전원 사면이란 타협책으로 종결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연일 들끓는 시위 대학생과 사회인사, 교수와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언론자유의 절실함을 외치고 정부는 교묘한 방법으로 언론탄압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 전전긍긍하던 70년대 초,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먼저 생긴 것이 기자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노동조합 결성이었습니다. 정부와 신문사 내부 경영진과 싸우는 무기로서 노조보다 더 강한 단체가 없었고, 당시에 언론사에서 노조활동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방직공장과 공단의 여성근로자들이 겪는 부당해고, 임금착취, 인간 이하의 처우 등 고통과 멸시와 성차별을 기사로 고발하는 언론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저는 동아일보 기자노조 결성 하루 전에 김두식 기자의 집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 노동청 지방 노동사무소에 노조결성 신고를 하는데 참여했으며, 출판국에서 제일 먼저 무기정직 처분을 받았다가 회사에서 백지화하여 다시 근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