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된 나의 지리산 산행기---한국의 산에서
2009. 10. 8. 23:48ㆍ카테고리 없음
![]() ![]() 제목: 37년전의 지리산 추억담 (!) 김양래 한국의 산하 애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죽 입니다. 여기서 만난지 별로 안된 산사람입니다. 오래 된 옛날 이야기지만, 오늘은 지리산 등반의 역사(?)에 대해 한마디 하렵니다. 요즘은 지리산 천왕봉을 한번도 못 올라가 본 사람은 산악인으로서는 좀 창피하지요. 그러나 30,40년전에는 어떻게 지리산을 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의 보따리를 풀어 놓겠습니다. (지리산의 추억 37년) 나는 37년 전에 아무 것도 모르고' 친구 따라 강남으로 간' 산입니다. 남한의 최고봉인 지리산과 한라산을 정복한 것입니다. . 여름방학을 맞아 그 때 유행한 무전여행을 갔습니다. 돈 한푼도 없이 가고 싶은 데를 갔다 오는 그런 여행을 말합니다. 지금의 배낭여행과 비슷한 것입니다. 7월달 뙤약볕이 내리쬐ㅡ는 어느날 고등학교 졸업 동기생이 대학도 들어갔겠다 실컨 놀아보자고 공모해 가출을 결심하고 서울역에 모였습니다. 한달 먹을 반찬과 쌀을 가지고 오기로 했고,돈은 한푼도 가져가면 안되었습니다. 서울역 시계탑앞에서 만나보니 모두 6명이 모였는데 한 친구가 한달 먹을 쌀 가마니를 메고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하도 기가 차서 " 야. 너 그거 어디서 가져온거야. 너 뒤주에서 퍼왔지?"하고 따지니까, 그 친구 " 엄마가 여행 간다고 하니까, 가지 말라고 해서, 새벽에 몰래 쌀가마를 메고 뛰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종로 4가 연건동에서 말입니다. 자세히 보니 그 친구의 양팔이 시퍼런거 있지요. 쌀이 얼마나 무거운지 완전히 허리가 90도는 구부러져 있지 않아요. 기차표는 누가 먼저 와서 사놓은 것. 칙칙 폭폭 기차는 달리고, 우리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우리는 차안에서 쌀 가마를 풀러 6등분을 해서 각자의 군용배낭에 나누었습니다. 바로 검표를 받게 되었습니다. 차표를 보니 영등포까지만 끊은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각자 알아서 해!" 대장의 지시로 일제히 흩어졌습니다. 기차는 굴을 몇개를 지나가고 대전역을 지나 어딘가 달리고 있는데, 또 검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밀리고 밀리다가 이리역(지금의 익산)에서 일단 내리기로 했습니다. 캄캄한 역에 내려서 세어보니 6명이 다 있었습니다.누군가가 "나가면 걸려. 여기 플랫홈에서 자고 내일 새벽 첫차로 가자."고 해 어둑컴컴한 구석에 드러누워 총총한 별을 쳐다보며 새벽이 오길 기다렸습니다.모포를 뒤집어 쓰고 눈만 내놓고 잠을 청하는데,어디서 날라 들엇는지 "왱왱"소리가 나더니 모포속으로 마구 물어대는게 있었습니다. 이리 모기--- "야. 여기는 도저히 잘 데가 못 된다." 하나 둘 모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때 역무원이 후래시를 갖고 순찰을 돌다가 우리를 발견," 학생들 여기서는 못자!'하면서 객차로 안내해 따라갔습니다. 거기는 이동매점의 종업원 숙소 였습니다.자세히 보니 거지들도 많고, 험상궂은 깡패도 보였지만, 그들과 함께 자기로 했습니다. 이 시간이 새벽3시.우리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세수도 못하고,첫차를 타고,전주에서 내려 철길을 따라 가다가 개구멍을 발견,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일행이 모두 용하게(?) 역사를 빠져나와 남원을 거쳐 마천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드디어 대망의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흥분하기 시작, 출렁출렁 매달린 구름다리를 건너,백무동까지 하루 종일 걸었습니다. 백무동은 산 중턱으로 모든 생필품을 지게로 져 날라 먹는 화전민 촌. 우리는 개울가에 A텐트를 치고, 밥을 해 먹고 자려고 하니 하늘에 별은 총 총하고 이름 모를 풀벌레소리에 잠이 안 왔습니다. 서울의 부모님 생각, 애인 생각, 별의 별 생각이 다 났습니다. 다음 날 거뜬히 일어나 5만분지 1 지도를 펴고 색연필로 등산로를 그려가지고,지금의 한신 계곡을따라 가다가 하동바위로 올라갔습니다.온몸이 땀에 절어 빨래를 해 널어서 말리고,밤이 되면 자면서 오르고 또 올라갔습니다.그런데 산판과 목재소를 지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길 줄이야. 적막강산에 , 점 점 뒤쳐지는 일행이 생기고,지쳐서 쓰러지는 친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휴식을 하면서 세어보니 2명이 안 보였습니다. 앞으로 간 건지, 뒤에 쳐진 건지도 분간할 수 없는 우리는 무작정 그 자리에서 기다려서 소리를 질러 보기로 했습니다.그러나 한나절을 기다려도 무소식,그때서야 공포감과 함께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 않았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바시락 소리가 난 것 같아 자세히 들으니 신음소리가 들려 " 살아 있구나! 살았다."환호성을 지르고 찾아보니, 온몸이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마트면 무전여행 왔다가 두 친구를 잃을 뻔, 우리는 물을 떠다가 끼얹고, 주무르고 해서 겨우 정신을 차리게 하고 물으니,개울울 건너야 하는데 그냥 직진, 가다 보니 길이 없어져 그 때서야 잘못 들었다는 걸 알고,우왕 좌왕하다가 무서워서 다시 내려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입술을 보니, 분말주스를 마구 삼켜서 혓바닥이 벌겋게 딸기색이 되어 있었습니다.여기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다시 출발, 만 4일만에 장터목, 고사목지대를 지나. 어둑한 밤에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텐트를 치고 다음날 일어나보니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새벽같이 올라오시고, 다른 등산객이 올라와서 같이 식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돌무더기 움막에서 하루를 쉰 다음 감격의 천왕봉(1915m)을 뒤로 하고 하산, 법계사를 거쳐, 중산리로 뛰다시피 내려갔습니다. 하루만에 내려선 것은 호야통에 넣을 석유가 떨어진 때문이기도 하고. 하루 한번 있는 진주행 버스시간에 대야하기 때문. 점심도 거르고 굴르다시피 달려내려 갔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습니다. 이날 밤 우리는 기진맥진 한 몸으로 처음 민박집에서(가게) 자는 기쁨을 맛보았고, 또 부모님이 해주신 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만 4일을 오르고 만 하루에 하산 완료,마을 까지 도착,전원이 무사히 종주산행을 한 것입니다. 대학 1년생의 무전여행, 무전취식, 무모한 산행이 마감되는 순간...다음날 버스시간 까지 푸짐하게 차린 음식을 실컨 먹은 추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그 지리산이 37년이 지난 2000년 지금은 해마다 수만명, 수십만명이 다니는 고속도로가 되어 있으니 금석지감이 있습니다. 그후 우리는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서 돗단배를 타고 제주도로 잠입해 ,한라산 등반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나라 남한의 최고봉 2개를 난생 처음 타본 경험담입니다. 나이가 드신 분은 배 고팠 던 그때 그 시절을 충분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2000.5.28 새벽 일죽 산사람 김양래 답변이 없습니다. 시간: 2000/07/06 목 16:33:42 ![]() ![]() | |||||
![]() ![]() 드디어 올 것이 온 것 같다. 점점 날은 어두워지고 날씨 마져 추워진다. 공연히 으시시한 게 피어 오르는 농무도 심하고, 내려가는 비탈길이 바위 투성이다. 아...아....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싶었다. 2시간여를 내려선 즈음에 처음 쉬어서 한숨 놓고 있는데, 밑에서 마침 한 분의 등산객이 올라왔다. 우리는 반가워서 인사를 먼저 했다. 그 분은 아침, 저녁 수시로 장터목을 오가는 장사꾼(?)이었다. 이 곳 지리는 훤한 분으로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금은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올라갈 처지도 못 된다고 말은 했지만,여기서 그냥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아직 해는 안 떨어진 시간이라 모두들 자신이 있는지 내려가야 한다고 우긴다. 아! 난감하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또 흘러갔다. 다리는 부어올라 점점 뒤떨어지는 형님은 어쩌랴! 밤이 되었다. 몇시인지도 모른다. 좌우 구분이 잘 안되고, 높은 하늘에 는 별만이 총총...무조건 아래 방향으로 전진,전진,전진이다. 가도, 가도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방향감각이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한 후라시는 승용차에 놓고 왔으니, 이제 누구를 원망하랴. 그럴 여유도 없고,이제는 죽이 되나 밥이 되나 빨리 내려서는 길밖에... 한신계곡은 깊은 소와 담과 폭포가 이어진 길, 30여개의 폭포가 연이어진 골이다. 이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는 것이다. 한 발을 디디면,겨우 20cm 를 간 것이다. 군대에서 야간 포복을 해본 사람은 알 듯한 보행방법? 동원 되었다. 높은 포복 자세로 얼마나 갔을까, 이제는 앞이 안 보인다. 귀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땀이 옷을 다 적셔서 손으로 짤 정도가 되 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포기(?)하려는 순간, 우리는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며 달이 뜨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음력 초승이라서 보이지도 않는다. 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환자가 있는데도 도와주시지 않으니.... 누군가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한다. 귀가 번쩍 뜨여 물으니, " 가스버너를 켜서 들고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일회용 가스가 떨어질 때까지 만이라도 더 내려 가기로 했다. 얼마나 갔을까? 가스횃불을 든 형님의 뒷 손을 잡고, 일렬로 줄지어 한발, 두발 내딛기 시작했다. 왠 바위,절벽,폭포가 그리 많은지.계곡을 건너고 다시 건너고 하다가 길을 잃었다. 조난이다..... 이젠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가기도 어려운 판국, 누가 "여기"하고 부른다. 길을 찾았다는 신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길이 없다. 이렇게 1시간여를 헤매다가 부탄가스가 다 떨어졌다. 우리는 이제 누구를 원망할 처지도 아니고, 참 막막한 순간이다. 그저 날이 밝기만 기다리는 수 밖에... 이젠 가스 라이터도 다 떨어진 상태. 더 이상 구원의 손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 순간 풀 섶에서 뭔가 보였다. 호랑이가 나타났나 하고 숨을 죽인다. 또 보이던 것이 금방 사라져 버린다. 뭘까, 한참 웅크리고 주시한다. 누가,"아! 저거다."하고 환호한다. 그게 뭐냐고 하니까,' 반딧불'이란다. 개똥벌레 말이다. 그 놈이 우리의 눈을 홀린 것. 꽁무니에서 발광하는 불빛이 얼마나 밝은지, 우린 깜짝 놀라서 도망 칠 뻔 했다.혹시 귀신에 홀린 건지,아닌지 몽롱할 뿐, 또다시 정적이 흐른다. 한 참 후에 형님 한분이 " 저 걸 잡아서 불을 만들자!"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라도 해서 갈 수만 있다면, 하면서 그 개똥벌레를 잡으려고 살금, 살금 다가가 손바닥으로 움켜 잡아 보았지만, 허탕이었다. 괜 한 생각, 잡히지도 , 잡지도 못하고 우리는 또 하염 없이 하늘만 쳐다보았다. 잠시 눈을 부치자, 모두 들 무서워서 손을 꼭 잡고 버틴다.사정이 이렇게 진전되니까, 그제서야 내가 사갖고 온 후라시를 놓고 온 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내가 고집을 부려야 하는 건데... 지금 와서 후회해 보아야 소용 없는 일.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운명에 맞기 는 일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명색이 등산대장이라고, 따라왔다가 이런 변을 당하니 .... 얼마나 나를 원망하겠는가 싶다. 다 들 회사 출근도 해야 하고, 사업상 약속도 있다고 한다. 나는 어찌 되든지 시간에 대야 한다고 오리발로 기어서라도 가자고 했다. 이렇게 헤매다가 우연히 등산로를 찾게 되었고, 멀리 마을의 흐미한 전깃 불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귀신에 홀려 있다가 도망친 기분이었다. 여기서 부터 힘이 솟는다. 누가 빨리 가라고 안해도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하산 10시간 만에 도착한 백무동은 새벽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 까지 땀으로 목욕,척 늘어 붙은 옷이 벗겨지지 않는다.땀 냄새가 이제야 진동을 한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여관에 들어가 먼저 목욕부터 청했다. 남자들은 수돗가에서 미역을 감고, 옷을 벗어서 말리고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 피곤하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꿈 속으로 빠져 들어간 후로는, 누가, 언제,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른다. 지리산(1915m)도 당일 등산이 가능하다고 큰 소리 친 나 때문에 일어난 어처 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때 또 한번' 대장' 모가지가 날 아 간 날이다.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등산대장을 안 하기로... 뭐 솔직이 생기는 것도 없는데, 사서 고생하고, 욕 먹고, 좋은 소리 못듣고 이게 뭔가 하는 후회가 막 떠올랐다. 그러나 이런 고행(?) 덕분에 우리 문양 산악회는 더 더욱 단단히 뭉치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걸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악몽의 지리산, 지리지리 멀기도 한 지리산, 개똥벌레가 사는 지리산, 가볍게 보았다가 큰 코 다친 산, 너무도 크고, 너무도 매서운 산, 귀신이 사는 계곡, 반달 곰이 사는 산, 아직도 원시림으로 남은 산, 경치보다도 큰 교훈(?)을 준 산이 지리산이다. 지지리도 못 난 이 사람이 지리산을 갔다 온 소감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 |||||
![]() ![]() 제목: 귀신에 홀린 한신계곡에서 만난 반딧불의 유혹(?) 사실 지리산 같은 큰 산, 웅장한 산, 육중한 산을 몇 번 다녀오고 큰소리치는 건 어불성설이다. 전라남북도,경상도 3도에 걸쳐진 그 광활한 산맥, 백두대간을 어찌 한마디로 표현하겠는가... 그저 수 많은 길중에 하나, 둘 정도의 코스를 종주하는 게 보통이다. 나는 1997년 초가을에 몇년을 별러서 최단코스를 당일 산행으로 갔다온 어리석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서울에서 토요일 직장을 마치고,먼 여정 준비를 한 후 일행을 포텐셔 승용차에 태우고 밤 12시에 출발했다. 모두들 상기 된 표정, 마음을 비우고,단단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컴컴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즐거운 환담을 나누며 우리는 언제 갔는지 모르게 대전을 지나 옥천,금강 휴게소로 들어섰다. 칠흑 같은 밤, 차소리만 요란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온 여행객들로 붐빈다. 출출한 김에 급히 김밥과 우동을 시켜 먹었다. 새벽3시. 영동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국도로 들어서서 금산읍을 거쳐,진안, 장수를 지나 남원에 도착했다. 길고 지루한 아스팔트 길이었다. 중도에 졸음이 와서 장수군의 큰 고개에 있는 간이 휴게소에서 내려 풀밭에 드러누어 쉬어서 갔다. 여기서 만난 젊은 청년(화물차 운전기사)이 자기 고장이라고 자랑을 늘어 놓으며, 전국에서 제일 깨끗하고, 오염이 안 된 지역, 청정한 곳 이라고 한다. 은근히 이 곳 땅을 사라고 권유, 임야가 평당 300원 정도면 살 수 있단다. 와... 이렇게 싼 데가 있나, 아직도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시골 진짜 심산 유곡,오지로 남은 땅이 있었다. 우리는 남원 춘향을 모신 광한루를 돌아 다리를 건너 곧바로 정령치고개 를 치고 올라가 3거리에서 좌회전해 인월,마천에 도착했다. 아직도 어스므 레한 새벽녁. 여기저기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긴 마천교(예전의 구름다리) 를 건너 백무동계곡을 끼고 중백무,상백무동 주차장에 새벽 7시에 도착했다. 아... 멀리도 왔구나 싶다.쉬지도 않고 달려온 '진주라,천리길' 지리산 입구다. 우리가 잡은 최단코스는 백무동매표소---소로길---하동바위---샘터---암릉길 ---장터목산장---제석봉---통천문---고사목지대---정상(1915m)천왕봉 코스 였다. 왕복 10시간이 걸린다. 차를 최대한 가까운 지점까지 올라가 가게 옆 공터에 붙였다. 아직 매표원이 출근하지 않은 시각.짐을 챙기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산속이라서 그런지 냉기가 돌고 추워진다.원정등반이라서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후레시를 큰 걸 사갖고 왔는데,한 형님이 이런 건 무겁게 왜 가지고 다니느냐고 트 렁크에 던져버린다. 속이 좀 상했지만, 자존심(?)을 꺽을 수 없어 그냥 출발했다. 8시가 다 되었다. 각자 배낭을 메고,일열로 오르기 시작, 오늘 중으로 그것도 늦지 않게 오후6시전에 내려와야 한다. 부지런히 걸어 한신계곡과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좌회전, 오솔길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1시간여 오르니 하동 에서 날라왔다는 하동바위,여기서 잠시 쉬고 또 오른다.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고 힘이 든다. 영차 영차 ,서로 힘을 내어 바위길을 돌고 돌아 약수터. 시원한 물을 마시고 수통에 가득 물을 채우고 다시 도전, 가파른 능선길이다. 와...이렇게 길고 지루해서야. 미치겠다. 햇빛이 내리 쬐어 날은 점점 더워지고 쉴 시간은 없고..... 근사하게 생긴 고사목(?)에서 사진을 한컷 누르고, 낑낑대며 오르다가 잠시 쉬는데 마누라가 배낭끈이 떨어져 들고 올라온다. 어이쿠! 저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는데 마침 정상에서 내려오는 아줌마들 중에 바늘쌈지를 갖고 있어서 빌려주어 대충 꼬매 고 다시 올랐다. 나는 기운은 점점 떨어지고, 맨 뒤에서 일행을 따라가기 바쁘다. 혹시나 해서 배낭 속에 준비물을 완벽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5명이 세끼 먹을 물과 음식, 코펠, 버너,망원경, 카메라, 불판, 돗자리 등을 넣은 배낭 무게만 10kg이 넘는다. 결국 나는 일행보다 20분이나 늦게 장터목산장 앞 야영장에 도착했다. 오후1시. 배가 고파서 야단이다. 찬바람이 휘익 불어와 어디 마땅히 서 있을 만한 곳도 없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화장실 뒤편에 자리잡고, 간신히 바람을 등지고 라면을 끓여서 후르륵 마셨다. 상대방 얼굴을 쳐다 보니 모두 죽을 상이다. 그래도 오늘은 모두들 좋단다. 역사적인 등반 날이 아닌가. 진짜 역사적인 날(?)이 될 줄이야....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욕심에 제석봉으로 해서 통천문,정상으로 강행군. 넓은 바위 투성이의 천왕봉은 등산객들로 만원이다. 기념사진을 찍으려 해도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조바심이 난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오늘 중에 못 내려간다. 겨우 사진을 한방 누르고, 급히 하산, 오후3시다. ! 다리는 절고, 허리가 아파오고,온 몸이 쑤신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모두 지쳐서 어쩔 줄 모른다. 아무 말도 없다. 갑자기 조용해진다. 아직 이른 지 단풍이 7--8부 능선에 피기 시작한다 .큰 단풍나무가 예쁘게 피어 사진을 찍었다.나는 장터목에 가면 산장이 있으니까, 자고 새벽에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일행은"빨리 내려가면 되는데..." "왜. 이런 굴속같은 데서 자느냐?"면서 막무가내다. 결국은 내려가기로 결정해, 야영장을 내려서는 순간 형님 한분이 나무계단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는게 아닌가..... 큰일이다 싶어, 달려가서 상태를 보니, 고통이 심할 정도로 발목을 다친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하산이 어려우니, 여기서 자고 가자고 다시 얘기 했더니. '병원에 가려면 빨리 내려가야지" 무슨 소리냐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이런 때 쓰는 말 이구나 싶었다. 30여분을 주무르고, 식부를 하고,쉬어 겨우 일어섰다. 다친 형님은 책임감 때문에 "내려가서 어찌됐던 침을 맞아야 한다"고 버틴다. 이렇게 해서 내려선 지리산 산행이 어찌 되었을까? 더우기 오던 길로 안 내려 가고, 한신주곡으로 들었으니 말이다. <<다음 페이지에 계속>> 2000.6.22 일죽 산사람 ![]() ![]() | |||||
![]() 지리산 종주를 하고나면 당사자들은 그 성취감에 취하여 자신이 걸어온 길을 과장해서 말하곤 한다. 그래서 지리산주능선의 길이는 대충 백리(40km) 쯤 되는 걸로 치부해왔다. 그러나 줄자를 가지고 실측을 해보니 정확한 길이는 34.2km였다. 자세한 것은 지리산 등반정보 - 민족의 영산 에 자세한 내력이 설명되어 있다. 이 사이트에서는 산장, 코스, 사찰, 봉우리별 정보가 정리되어 있다. 맨첫페이지의 사진은 "한국의 산"에서 찍은 남부능선 사진인 것이 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