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의 흥망성쇠에는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의 붕괴에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최근에서야 이같은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과거 문명이 숲 제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면, 현재와 미래의 문명도 분명 그럴 것이다. 인간이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찬란한 문명도 붕괴할 것이다.
나무와 나, 그리고 인류
내게 나무는 희망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존재는 희망 없이 살아가는 자이다. 희망은 모든 생명체의 생존 조건이다. 나무는 내 삶의 에너지다. 생명체는 에너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나무는 나를 존재케 하는 생명수다. 그러나 이제 나무는 나에게만 희망과 에너지가 아니라 인류의 희망이자 에너지이다. 엄격히 말하면 나무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희망이자 에너지였다. 단지 그 동안에는 인간의 무지로 나무가 그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몰랐을 뿐이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나무를 만났다. 먹고 살기 어려울 때 나무를 만났다. 그래서 나무는 생명의 은인이다. 내가 힘들 때 나무를 찾았듯이 인류가 힘들 때도 나무에 기댔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가 기댄 것은 바로 나무였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까지를 ‘목재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무가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해 왔다. 문자는 인류 문명의 잣대 중 하나다. 그런데 문자는 대부분 나무에 기록했다. 인류가 남긴 기록문화의 대부분은 나무 덕분이다. 문명의 잣대 중 또다른 요소인 청동기도 나무로 만들었다. 청동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로 불을 만들어야만 한다. 높은 온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숯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수 없이 많은 나무가 사라졌다. 그래서 청동기의 양은 나무의 양과 비례한다. 목재시대의 철기도 나무로 생산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의 흥망성쇠에는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의 붕괴에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최근에서야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과거 문명이 숲 제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면, 현재와 미래의 문명도 분명 그럴 것이다. 인간이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찬란한 문명도 붕괴할 것이다. 현재 내가 지속적으로 나무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의 문제가 곧 인류의 문제라는 인식이야말로 지구촌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다.
나무 생명으로 바라보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가치는 동등하다. 다만 역할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면서 뭇 생명체를 생명으로 여기는 데 인색했다. 나무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나무를 생명체로 바라보는 것이 인류가 사는 방법임을 주장하면서 나무를 세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복제하지 않는 한 각각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각각의 나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나무’라고만 생각한다. 나무는 인간처럼 생명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나무와 풀을 죽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요즘도 언론에서 흔히 만나는 ‘식물인간’이라는 표현에서 인간의 식물에 대한 천박성을 목격한다. 인간이 식물인간이니 식물국회니 하면서 식물을 죽은 존재로 인식하는 한, 인류의 미래는 밝지 않다. 식물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는 어둡다. 인간의 천박한 인식은 ‘잡목(雜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나무를 비롯한 몇몇 나무를 제외한 나무에 붙이는 이름이 잡목이다. 잡초도 마찬가지다. 식물을 생명체로 바라보면 결코 이런 표현은 나올 수 없다. 인간에게 몇몇 사람만 제외하고 ‘잡놈’이라 부르면 기분이 어떨까? 한 존재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사랑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면서 생명체를 존경과 존중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건 사기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존경과 존중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입발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소중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위대하다. 그래서 한 그루의 나무도 위대하다.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나는 것은 바로 위대한 존재를 만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이라야 아름답다. 이런 만남이라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나무에는 키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키가 크면 교목(喬木)이고, 키가 작으면 관목(灌木)이다. 잎이 떨어지면 낙엽수(落葉樹)이고, 잎이 떨어지지 않으면 상록수(常綠樹)다. 잎이 바늘 같으면 침엽수(針葉樹)고, 잎이 크면 활엽수(闊葉樹)다. 사람들은 때로 키 작은 존재를 무시한다. 나도 키가 작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 세상의 사물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정 존재를 선호한다. 선호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상대를 무시하면서 선호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키가 크면 큰 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생명체로 바라보면 키가 작든 크든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연다.
나무 보는 법 -----안아보기누워서보기
나무를 보는 법은 다양하다. 나는 요즘 나무를 누워서 본다. 그 동안에는 나무를 안아서 보기도 하고, 만지면서 세어보기도 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권했던 방법 중 하나가 안아보기 혹은 나무세기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무를 멀리서 바라본다. 거의 나무를 안아보지 않는다. 세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나는 수업시간에 어김없이 나무를 세거나 안아보게 한다. 내가 학생들에게 나무를 안게 하는 것은 생명체로 인식하길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무를 안으면 나무의 속을 볼 수 있다. 나무의 속은 겉과 상당히 다르다. 나무를 안으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속을 보기 전까지는 대부분 나무의 겉만 보고 한 존재를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한 존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안아봐야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나무를 안고 하늘을 보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자 극락임을 체험할 수 있다. 가을 햇살이 비치는 날 단풍나무를 안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는 날, 메타세쿼이아를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몸속 찌꺼기는 태풍에 먼지처럼 날아간다. 어린 시절 소 꼴먹이러 가서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본 것처럼 누워서 나무를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내가 누워서 나무를 보는 것은 나무 전체를 보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서 있는 나무를 서서 보면 나무 전체를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진정으로 나무를 보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누워서 본다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춰서 한 존재를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누워서 몸을 낮추더라도 나무만큼 낮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생명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자만이 가장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나무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깨끗한 바다 같은 존재다.
나무와 도(道)---- 살아남기
나무는 수도승과 같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에 갇혀 있는 수도승이 아니다. 나무는 일상에서 도를 깨친 존재이다. 도는 길이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바로 길이다. 이러한 나무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한다. 나무의 길은 외길이다. 외길이 다양한 길을 만드는 법이다. 줄기는 외길이지만 그 줄기가 많은 가지를 만든다. 외길을 걷다보면 문득 저절로 다른 길이 생긴다. 또 다시 외롭게 길을 가다보면 또 길이 생긴다. 그래서 도는 외롭지만 결코 외롭지 않다. 도는 힘들지만 결코 힘들지 않다. 줄기는 가지가 있기에 외롭지 않다. 가지는 줄기가 있어 든든하다. 공자는 자신의 핵심 사상인 인(仁)을 나무에 비유했다. 공자가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사상을 나무에 비유한 것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노자는 자신의 핵심사상인 도를 나무에 비유했다. 노자가 평생 동안 절차탁마한 철학을 나무에 비유한 것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중국 고대의 두 성인(聖人)이 자신들의 사상을 드러낼 때 나무를 이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무를 보면서 크게 깨닫지 못했다면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나무를 통해 뭔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자와 노자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자신들의 사상과 철학을 나무로 드러냈다는 것은 평범한 곳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서 생각하는 게 인이라는 사실을, 삼라만상이 모두 진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두 성인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무에 주목한 것은 누군가를 닮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생명체든 그 누굴 닮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굴 닮을 것인가? 생명체는 부모를 닮는다. 부모를 닮지 않으면 불효자식이다. 그래서 닮지 않는 불초(不肖)자식이 곧 불효자식이다. 과연 부모는 누굴 닮는가? 인간은 땅을 닮고, 땅은 하늘을 닮고, 하늘은 도를 닮고, 도는 자연을 닮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결국 인간은 자연을 닮는다. 공자와 노자가 나무에 주목한 것도 바로 나무에서 삶의 원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무는 단순하다. 도도 단순하다. 나무는 순박하다. 도도 순박하다. 나무는 꾸미지 않는다. 나무가 도다. 나무처럼 사는 게 도다. 그래서 나무를 바라본다는 것은 도를 찾는 것이다. 나무를 안아본다는 것은 도를 가슴에 품는 것이다. 누워서 나무를 본다는 것은 도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의미
인간이 나무에게 던지는 최고의 찬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어떤 존재든 아낌없이 줄 수 있다면 위대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무에게만 그런 찬사를 보낼까? 같은 제목의 동화 덕분일까? 살아서든 죽어서든 모든 것을 다른 존재에게 주고 가는 나무라서 선사한 찬사일까? 꼭 나무만 그런 존재일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 같지 않을까? 나는 나무가 아낌없이 주는 존재로 평가받는 이유가 궁금하다. 나무와 나의 차이는 무엇이기에 나무는 그런 평가를 받고 나는 그렇지 못한가를 고민했다. 과연 나무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무와 나의 차이는 다름 아닌 이기성의 정도이다. 나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다. 아니 이 세상의 위대한 존재는 전부 이기적이라야 한다.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면 결코 아낌없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할 때만이 남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주의자를 비난하면서 나무를 비난하기는커녕 찬미한다. 철저하게 이기적일 때 이타적일 수 있다. 아니, 이기와 이타는 처음부터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와 석가와 공자와 노자는 이기주의자다. 나무는 처음부터 이기와 이타를 구분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많은 일에 기웃거린다. 그러면서도 이타와 봉사를 외친다. 줄 수도 없으면서 줄 수 있다고 우긴다. 이 세상의 생명체는 결코 누굴 위해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자신만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남을 위해 산다고 외치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어지럽다. 나무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린 그런 나무를 존경한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의 그런 자세를 배워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스승인 까닭이다.
이름 알기--- 나무에 다가서는 방법
한 존재를 정확하게 알기란 아주 어렵다. 한 존재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를 아는 것도 매우 어렵다. 아마 평생 공부하더라도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아가는 방법 중 하나는 이름에 대한 이해다. 이름 속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의 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다. 사람이 붙일 때 나름의 원리가 있었다. 그 원리를 안다면 한 존재를 이해하는 데 편리하다. 나무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식물학자다. 식물학자 중 스웨덴의 린네는 식물 이름 붙이는 원칙을 세운 사람이다. 식물도감에 등장하는 이른바 학명(學名)은 린네의 이명법(二名法)에 따른 것이다. 속명과 종소명으로 이루어진 이명법은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학명은 라틴식으로 읽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칙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식물과 동물의 학명 체계를 완성한 린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 나무에 학명을 붙인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누가 한국의 식물이름을 학문적으로 정리했을까? 이 사실을 알면 나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나무 도감의 학명에는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암호’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명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면 식물 이름의 어원은 물론 식물과 역사관계를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나무학명을 분석하면 일본제국주의의 음모를 밝힐 수 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식물을 통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무 이름을 아는 작업은 단순히 한 존재를 아는 차원이 아니라 나무와 관련한 복잡하고 거대한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체계적인 나무 이름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한층 차원 높은 세계로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