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 02:50ㆍ카테고리 없음
지리산 야간산행기 3
10년전 야간 산행의 잊지 못할 추억
지리산은 10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같이 당일치기 산행을 감행했다가 큰 코 다친 산이다. 그 때의 아픈 추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욕심이 앞선 무모한 산행의 표본이 바로 지리산 등반이었다. 나는-- 등반대장--어쩌구 하며 서울 수도권 산을 두루 돌아다닌 후 자신이 생겨 도전해보겠다고 동서와 형님친구 등 문양산악회 회원 6명이 토요일 밤 12시에 서울을 출발해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으로 향했다.
새벽 6시 어둠이 깔린 상백무동에 도착하니 국립공원 매표소가 아직 문을 안 열어서 입장료를 안 내고 모두들 기분이 상쾌하게 출발했다. 이번 장거리 원정 등반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단단히 준비를 한다고 손전등까지 큰 것을 사서 챙겨왔는데 동서가 대낮에 그건 무겁게 왜 가져왔느냐고 트렁크에 던지며 나무랐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트렁크 문은 닫힌 상태였다.
아직 동트기 전 어둑어둑한 등산로 길을 찾아서 가장 쉽고 가까운 코스인 하동바위코스를 올라갔다. 왕복 12시간은 걸리는 장거리코스라 한편으로 겁도 많이 났다.
나는 일행이 먹을 음식과 취사도구(로얄 석유버너)와 돗자리까지 배낭에 지고 나머지는 물병 한 개씩만 들고 올라갔다. 능선 중턱의 샘터에서 차가운 물을 먹고 다시 도전하는데 올라오는 등산객이 한사람도 안 보였다. 작열하는 태양열 때문에 머리와 등에서 비 오듯이 땀이 흘러내렸지만 앞서서 잘 리드해나갔다.
그러나 지리산은 남한에서 가장 크고 길고 깊고 험한 장대한 산이다. 경사가 급해지면서 점점 일행과 떨어져 30분이나 늦게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초죽음이 되어 오르니 일행은 배가 고파 죽겠다며 왜? 그렇게 늦었느냐고 호통까지 친다. 나도 배가 푹 꺼지고 눈이 10리는 들어갔다. 이 날도 등산대장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고, 또 대장의 모가지가 달아날 판이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부랴부랴 밥 지을 장소를 찾아서 산장 화장실 처마 밑에서 라면을 끓이고 김치에 갖가지 준비한 반찬으로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아침 겸 중식을 먹고 나니 모두들 기진맥진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천왕봉을 올라갈 것이냐 다시 하산하느냐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은 힘든 사람은 산장에서 쉬고 나머지는 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가파른 계단길인 제석봉을 향해 올라가니까 모두들 가겠다고 따라온다. 만일 길을 잃으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어렵게 어렵게 제석봉을 거쳐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야호-- 야호 누가 먼저 소리칠 것도 없이 호연지기를 맛보는 순간...사방으로 한없이 펼쳐진 백두대간의 줄기와 봉 봉 봉... 경치 구경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는데 줄을 설 정도로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다. 30분은 걸려서 천왕봉 돌비석에서 사진을 박고 내려왔다. 모두들 다리를 찔뚝거리고 여기 저기 털썩 주저앉는다.
촛자 산악인에게 내린 혹독한 형벌
장터목 산장에 들러서 하산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알아보니까 시간이 늦었다며 자고 가란다. 내일 출근하려면 오늘 중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하고 야영장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동서 친구 분이 다리가 꼬이면서 앞으로 팍-- 하고 고꾸라져 넘어지는 것이다. 얼른 달려가서 잡았더니 <아이쿠-->하며 오른쪽 발목 쪽을 가리키며 울상이었다.
얼굴에 찰과상이 났고 등산화를 신은 발은 아파서 벗기기도 힘이 든다. 발목을 다친 것이다. 부목을 대야 한다고 나무를 주워 발목에 묶어보지만 한번 삔 골절상이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나는 이런 상태로는 내려갈 수 없으니 올라가서 응급조치를 하고 내일 내려가자고 했다. 그런데도 형님은 빨리 하산해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누운 채로 버틴다.
워낙 빠듯하게 정상 도전을 시도한데다가 정상 부근에서 부상 사고 발생, 거기다가 하산하느냐 아니냐로 설왕설래하면서 불안감이 압박해왔다.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지도를 보고 한신지곡을 선택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골짜기는 폭포와 소가 30개나 숨어 있는 비경이지만 여름 장마철에는 출입이 금지된 위험한 곳이다.
얼마만큼 내려가는데 앞에서 스님이 올라와서 내려가는 길을 물었다. 일행을 자세히 살피더니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려가면 산속이라 6시면 어두워지고 밤이 되면 동물도 많으니 다시 올라가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발목을 다친 형님은 내려가야 한다고 막무가내 버틴다.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고통스러운 발목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할 판이다. 초승달도 안 뜬 칠흑같은 그믐 밤길을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 서울 근교를 수도 없이 쏘다녔어도 당일로 주간 산행만 한 우리는 야간산행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드디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형님 어깨를 부축하고 나무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서 내려간 지리산은 우리 같은 초보자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 (제1편)
=================================================================
2008.05.24--25
무박산행--동명산악회
회장; 서옥현, 018-327-0482
참가자; 장인선, 서상철, 신양자. 김양래 4명 외
지지리도 못난 노숙자 지리산에 입산하다
아직 달력은 5월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27도를 웃돈다. 텔레비전의 뉴스를 들어보니 남쪽지방--제주도와 경상도 전라도--은 비가 온단다. 중부 지방만 비가 안 왔다. 대망의 지리산 무박산행 준비를 하며 갖가지 지나간 추억과 상념이 떠오른다. 만일의 비를 대비해서 밤중에는 추우니까 등산복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목장갑, 헤드랜턴, 모자(끈 달린 것), 오버트라우저, 우비, 여벌 옷가지, 손수건, 페트병, 물컵, 칼, 망원경, 선글라스, 양갱, 백설기 떡, 수첩, 디카, 핸드폰, 밧데리 등을 챙겨놓았다.
나는 아무리 가까운 산에 가도 등산장구 챙기는 데는 도사다. 그것도 배낭, 등산복, 등산화등 기본적인 옷차림도 모두 메모지에 적어놓는다.
이번에는 산악회의 무박산행에 참여하는 것이다. 적어도 40-45명의 신청자가 관광버스에 타고 등산대장의 지시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잠시도 대오에서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평소에 내가 산악회 등산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라 별로 탐탁하지 않은 단체산행을 간다.
온 몸에서 열이 오르고 컨디션이 안 좋아서 며칠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떠나는 날까지 가봐서 결정하자고 버틴 디데이가 돌아왔다.
후덥지근한 토요일 밤 10시 40분 군자역에서 우리팀은 탑승했다. 버스는 창동에서 노원역을 거쳐서 왔기 때문에 꽉 차있었다. 천호역에서 나머지 회원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산악회 회장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등산안내도를 나눠주면서 교통편과 등산코스와 소요시간....그리고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며 산악회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지리산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산이라 발을 잘못 딛거나 길을 이탈하면 사고가 난다는 것이다. 맞다....백번 맞는 당부다. 나는 박수를 치자고 했다. 그랬더니 박수를 치면 손바닥이 오장육부와 통해서 건강에 좋다며 말을 이었다. 지리산에는 야간에 노숙자가 많은데 지하철이나 서울역 노숙자와는 다르다. 지리산 노숙자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야간등산을 하며 더러는 도우미나 산장지기, 환경지킴이로 돈을 벌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밤에 걷는 산행이 건강하게 사는 길이라며 농담을 한다.., 밤일을 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90살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회장 말대로라면 우리도 지금부터 지리산 노숙자가 아닌가 씨익 웃어본다. 산악회 한번 따라나섰다가 나도 노숙자가 되다니...ㅊㅊㅊ. 밤 12시를 지나니 모두들 조용하여 불을 끄고 잠을 청한다. 잠이 잘 안 왔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얼만치 갔다. 대전을 거쳐 대진고속도로(대전--진주)로 진입해서 금산휴게소에 잠시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다시 출발, 새벽 3시 30분에 마천 백무동 매표소에 도착했다.
언제 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오른 한신계곡
지리산은 우리나라 산악문화의 메카다. 뭐든지 지리산을 빼면 안 된다. 그 높이와 그 크기와 그 경치와 그 많은 골과 봉이 단연 최고의 산맥이다. 국립공원 제1호에다가 1억5천만평의 넓이,85개의 봉우리,99개의 골, 남강과 섬진강을 낀 광대무비한 백두대간의 시발점이다.
요즘은 백두대간을 안 탄 사람은 산악인 대열에 끼지 못한다. 오늘은 그 지존한 곳을 종주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설령 컨디션이 안 좋아도 좋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 단단히 각오하고 오른다.
밤공기가 차다. 역시 지리산 자락은 여느 공기와 다르다. 상큼하고 시원했다, 야영장을 거쳐 가내소 자연공원 입구에서 A팀(가까운 직등코스, 하동바위 능선길)과 B팀(우회코스, 한신계곡--세석대피소--장터목)으로 갈라서 오른다. 우리는 B팀에 합류했다. 서대장은 무려 40회나 지리산을 탄 베터런이므로 가이드로 나섰다. 달은 초승달인데 칠흑처럼 어둡다. 헤드랜턴을 머리에 차고 앞사람의 발을 보며 따라간다. 울울창창한 수림 속을 걷는다. 이름 모를 비목이 언 뜻 눈에 들어오더니 줄곧 위험한 자갈길이 이어지고 쇠--쇠-- 콸콸 거리며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1시간 가량 땀을 흘리며 올라가다가 두꺼운 등산복을 벗고 다시 출발했다. 첫나들이 폭포를 지나서 가내소 폭포를 지난다. 사방이 캄캄하고 어두워서 어느 정도 고도에 올라왔는지 이정표도 안 보인다. 앞 사람의 발만 보고 따라가는 형국이라 피곤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올라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산악회 따라갔다 와서 어디로 다녀왔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한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나무 계단다리와 철사다리 계단, 출렁다리를 건넜다. 이 길은 무서운 길이다. 8월 우기 때인 한여름에 폭우가 쏟아지면 집채 같은 계곡물이 넘쳐나서 사람이고 나무고 돌이고 모두 삼키는 곳이란다. 쓰러진 고사목이 여기저기 보인다. 출발한지 2시간여...배가 고파오지만 간식을 꺼내 먹어야 하는데,,,
5단계로 갈라지는 오층폭포를 지나면서 잠시 쉬어 땀을 식히고 사진기를 눌렀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드디어 막바지 오름길에 온 느낌이다. 산세는 점점 가팔라지고 사방을 보니 협곡에 둘러쳐진 악몽의 한신폭포에 다다랐다. 아래로는 집 채 만한 바위덩어리와 깊은 소와 담이 보인다. 여기서 잠시 쉬어서 김밥과 김치에다가 참이슬주까지 먹고 다시 출발, 지리산에서 제일 험하다는 한신주곡을 킹킹거리며 붙었다. 날이 밝아오면서 눈도 시원하게 잘 보이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나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 뒤에서 따라오는 등산객이 보여서 인사를 했더니 서울에서 온 우리 산악회 사람이다. 어떤 분은 곰취 단풍취나물이라며 한 봉지씩 손에 들고 달린다. 이런 깊은 협곡에 아직도 산나물이 있구나 싶다. 우리는 쑥이나 민들레 꽃다지나 알지 산나물은 몰라서 그냥 지나쳤다. 앞서 가던 서대장은 7시전에 해가 뜬다면서 벌써 세석산장으로 올라간 지 오래다.
황홀한 철쭉꽃밭 세석평전의 포근함에 취해
드디어 앞이 훤하게 트이면서 너른 벌판에 닿았다. 꿈속의 세석평전이 나타났다. 여기 저기 등산객들이 보이고 마치 내 고향에 온 것 같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반이다. B코스의 절반도 안 되는 세석대피소는 영신봉과 촛대봉에 포근하게 안긴 안부다. 우리는 대피소 식당에 앉아서 컵라면을 끓이고 김밥과 족발과 나물과 김치와 쑥 개떡을 식탁에 내려놓고 실컷 먹어 재꼈다. 시원한 맥주까지 술술 잘도 넘어갔다. 세석평전에는 하얀 꽃이 군데군데 보이고 철쭉은 아직 몽우리만 보였다. 적홍색의 진달래만 활짝 피어 우리를 반겼다. 야영장에는 한 사람도 안 보이고 언제 공사판을 벌였는지 컨테이너 박스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사위가 고요하고 고즈넉한 평화의 고원지대다. 포근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그냥 드러눕고 싶지만 늦어도 3시까지는 중산리에서 산악회 버스를 타야 한다. 깨끗이 쓰레기 청소를 하고 화장실(쇠파리가 들끓고 냄새가 심하다)을 다녀온 후 기념사진을 박고 9시가 넘어서 장터목으로 향했다. 서대장은 멀찌감치 앞서더니 돌아보면서 먼저 간다는 것이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발이 안 떨어지고 촛대봉으로 가는 계단길이 여간 힘이 들지 않다. 내 발바닥과 두 다리를 원망해보지만 별 수 없다. 강렬하게 내리 쬐는 햇볕 아래서 눈은 부시고 자꾸만 졸음은 몰려오고 앞길은 멀고 죽을 지경이다. 가다가 쉬고 쉬고 하면서 촛대봉 (1703m)을 지나고 내리막길을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내려가며 좁은 오솔길을 달린다. 신선생이 앞서고 내가 맨 뒤에서 따라갔다. 1시간을 내려서다가 아주 근사한 주목 한그루를 발견하고 쉬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배낭의 무게에 어깨가 축 쳐진다. 한참을 소나무그늘에서 쉬고 삼신봉을 넘어가다가 물고기인지 사람형상인지 동물발자국인지 괴상하게 암각이 새겨진 바위가 있어 또 사진을 박고 맨 뒤에서 달렸다.
11시가 지나서 연하봉(1721m) 표지목에 도착했다. 세석에서 2시간이나 걸린 능선길은 멀고도 험한 돌길이 이어졌다. 이제는 앞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도 늘어나고 산악회에서 온 사람들이 외길을 막는다. 비켜주고 쉬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내려선 장터목은 조릿대와 철쭉나무가 늘어선 고원평지다.
바글바글한 장터-- 장터목 대피소의 부산한 오후
역시나 산악회에 따라간 산행은 주행시간이 촉박하다. 밤새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도 11시 30분 대망의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제는 땀을 닦고 뭐 할 시간도 없다. 이래서 산악회 등산은 언제나 배로 힘이 든다. 늦으면 쉬어 가도 되고 하룻밤을 자고 가도 되는데...말이다.
나는 일찍이 거북이산행의 요령을 터득한 사람이다. 여유만만하게 느리게 쉬어가면서 경치 구경하고 발 씻고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한참을 쉬면서 사방 경치를 돌아보았다. 역시 장터는 장터다. 그래서 장터목이라고 명명한 것인지.!!! 산장에는 오고가는 울긋불긋한 등산객들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어디 그늘에서 쉴 곳도 마땅치 않다. 무거운 배낭을 풀어놓고 30분을 쉬고 땀을 식혔다.
목적지인 중산리까지 3시간이 남았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 치고는 지금까지는 잘 온 것 같다. 곧바로 계곡으로 내려설 것인가? 아니면 제석봉을 거쳐 정상으로 갈 것인가? 를 결정해야 한다. 장대장과 나는 상의를 해서 곧바로 하산하자고 했다. 앞서 간 서대장을 제외하고 3명이 식수를 받은 다음 급경사인 법천계곡으로 하산했다.
돌을 계단식으로 깔아놓은 등산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한발 내려서면 발바닥에서 불이 났다. 유암폭포를 지나 홈바위까지 장대장이 무척 힘들어 한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뒤에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비켜주기 일쑤다. 나보다는 아직 젊고 활기찼던 장대장이 오늘은 영 상태가 안 좋았다. 그러나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고 재촉했다. 계곡 물이 보이면서 조금은 안심이 되지만 갈 길은 멀고 자꾸만 뒤로 쳐졌다. 내가 배낭을 메고 가겠다고 해도 사양한다.
삼거리인 칼바위까지는 너무도 지루한 돌밭길이 이어진다. 지리산은 이래서 무릎에 충격을 주는 산이다.
어젯밤 잠 한숨 못잔 것이 후유증을 불러온 것이다. 커다란 소가 보이면 내려가서 발을 담그고 미역도 감고 다시 용기를 내서 하산, 그늘에서 땀을 닦고 해가면서 서로 서로 의지해서 내려섰다. 고난과 고통과 아픔의 하산 길에서 장대장은 말한다.
‘ 뜨거운 여름철에는 맥을 못 춘다’며 더위에 약한 체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3시간을 헤매고 겨우 핸드폰이 터졌다. A코스의 선발대가 언제 도착했는지 궁금해서 전화 연결을 해보니 우리 서대장은 1시에 하산했다는 것이다. 출렁다리가 있는 칼바위를 지나니 빨리 하산하라는 것이다. 오후 3시가 지났다. 택시를 타고 버스주차장까지 오라는 전갈이다. 우리는 급히 택시를 타고 중산리 집결지에 도착해보니 맨 꼴찌로 온 것이다. 지지리도 못난 지리산 노숙자는 처녀귀신에 홀린 것처럼 황급히 관광버스에 올랐다. 이번 무박산행은 우정과 사랑의 통일산악회에서 만난 인연을 끈끈하게 이어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산행이었다. 장장 12시간의 자기와의 피눈물나는 싸움은 끝났다.
어젯밤 서회장 말대로 지리산 노숙자로 참가해서 종일 놀고먹는 노숙자로 하산한 노숙자단체인 동명(같은 이름)산악회에 다녀온 소감이다. 먼 훗날 나도 노숙자였다고 웃으며 만나기를 바란다.
2008.05.31 밤 일죽 산사람